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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 Oct 18. 2021

하고 싶은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

내 욕망을 그대로 인정하기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심리상담은 내담자가 주로 얘기를 꺼내고, 상담자는 이를 묵묵히 들어주고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그림을 떠올린다. 감정이 격화될 수 있기에 지나친 언행이나 반박은 삼간다. 내담자는 그렇게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놓으면서 하나둘씩 과거를 깨달아가고, 치유해나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상담소는 전혀 반대였다. 상담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들어주고 편들어주는 것만으로는 변화와 행동으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본다. 상담할 때는 마음이 편하고 속에 모든 얘기를 한 것 같아 속 시원하지만 거기서 끝나버리고 결국 회복되지 못한 마음은 상담비 증가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상담자분은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물었다. 질문을 통해서 때로는 직설적으로 의견을 물어본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을 깨우치고 알아차릴 때까지 계속 대화를 이어나간다. 내담자는 처음에는 당황스럽다. 자꾸 파고드는 질문을 답하기 위해서 자신의 논리를 쌓아 올리다가 결국 무너지게 된다. 그때 부끄럽고 화가 나는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그 과정을 겪고 나면 비로소 내가 어떤 부분을 숨기고 있었는지, 과장하고 있었는지를 제대로, 명확하게 알게 된다.


예를 들어, 하루는 진로에 대한 고민을 얘기했다. 당시 나는 코로나로 여행사에서 휴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퇴사하고 지방으로 내려와서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일을 배우러 오라고 했고, 반대로 나는 젊은 나이에 실패하더라도 창업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여행사 휴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 까지 세 가지 선택지 중에서 고민 중이었다. 상담사 분은 셋 중에 정. 말.로 하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나는 당연히 창업을 해보고 싶죠,라고 답했다.


상담사분은 해보고 싶은 거랑 하고 싶은 거랑 다르다며 정. 말.로 하고 싶은 것을 물었다. 나는 답하기 어려웠다. 사실 창업도 그 정도로 열정적으로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젊은 나이에 한 번 뭔가에 뜨겁게 도전해봐야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아버지 회사에 가지 않을 핑계와 그리고 혹시라도 잘 돼서 성공한다면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다만 그 마음을 숨기고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내가 그 일을 도전하고 싶다는 열정이었다. 그 속마음을 꺼내고 인정하기까지는 몇 번의 상담이 필요했다. 


인간의 방어기제는 매우 단단해서, 절대로 그 속물적인 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상담사분은 아버지가 왜 내려오라고 하시는지 물었다. 나는 아버지가 건강도 좋지 않으시고 슬슬 은퇴를 준비하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상담사분은 아버지 회사를 왜 물려받기 싫은 거냐고 물었다. 나는 아버지랑 사이가 좋지도 않고 그다지 내키지 않고 내 손으로 뭔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돈이 많은 집안이 싫었다. 돈 때문에 가족 관계가 안 좋았던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돈을 증오했고, 부자를 혐오했다.


'내 손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다고 했죠. 그러면 지금까지 부모님 도움 없이 내 손으로 직접 했던 건 뭐죠?' 나는 답하기 어려웠다. 침묵하던 나에게 계속 말했다. '집도, 차도, 월세도, 등록금도, 용돈도 모두 부모님께 받았네요. 부족함 없이 살아왔네요. 뭐가 돈을 증오한다는 거죠? 내담자분은 돈을 좋아해요. 누 구보다도요. 그리고 그런 것을 원동력으로 할 때 더욱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내 손으로 뭔가를 이루고 싶다고요? 지금까지 했던 것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금 실천하고 있는 것도 없네요. 머릿속에 생각만 하고 있고. 정말로 가슴속에 뛰는 열정으로 그렇게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현재 자신에 대한 변명인 건지는 본인이 더 잘 알 것 같네요.'


받을 건 다 받아놓고 받는 걸 싫어한다니 역설 중에 역설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내심 더 받기를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나도 남들 앞에서 떵떵거리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부와 물질에 대한 혐오 때문에 그 마음을 숨겨야 했다. 자수성가만이 인정받고 2세 경영자나 3세 경영자는 무능력한 이들이라는 선입견이 있는 것도 사회의 분위기다. 나는 결국 그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남들이 다 그렇게 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숨기고 살아왔다고. 집안을 혐오하면서 살아왔다고.


상담사분은 아버지와 집안이라는 인생의 큰 부분을 부정하고 남들에게 속이고 살아간다면 결코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친구들이 아버지 직업을 물어볼 때마다 대충 얼 버부리고, 거짓말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일까. 상담사분은 2세 경영자가 왜 나쁜 거냐고, 내담자분이 잘 받아서 확장시켜 더 사업을 번창시킨다면 오히려 더 칭찬받아야 할 일이 아니냐며 말했다. 돈 많은 게 왜 부끄러운 일이냐, 그게 내담자분의 한 모습이니 그냥 자신 있게 얘기하라고 말했다. 당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은 맨땅에 헤딩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오랫동안 다져온 땅을 누구보다 오랫동안 봐왔던 내가 이제는 다지는 일이라고.


상담 중에는 이러한 마음을 인정하는 것이 힘들어서 답답했지만, 상담을 끝내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나를 오랫동안 감싸고 앞을 보지 못하게 했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아마 내 얘기를 들어주고 동의만 해줬다면 얻을 수 없었을 깨달음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다짐했다.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사회 분위기가 어떻든 간에 나는 나로 살아가자는 것을. 내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자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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