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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 Oct 15. 2021

솔직히 남 탓이 제일 쉽잖아

역경과 고난을 기꺼이 이겨내는 태도 배우기 

두 번째 상담소 방문이었다. 차이라면 저번 상담소에서 상담 이유를 적을 땐 "연애를 지속하는 게 어려워요"라고 적었지만 이번에는 "내 진짜 모습을 알고 싶어요"로 바뀐 정도가 있었다. 아, 하나 더 있다면 저번 상담소에서는 푸근한 인상의 통통한 흰 가운을 입은 남자 선생님으로 의사 느낌에 가까웠다면 이번에는 곱슬머리에 스웨터를 입은 동네에서 흔히 볼 법한 여자 선생님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내 시험 결과지를 보더니, 딱 봐도 힘든 삶을 살아왔을 것이라며 위로를 건넸다. 이상주의적 성형과 감성주의적 성향이 거의 비슷해서 항상 그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유형이라고 했다. 보통 사람은 한 개 수치에만 집중되어 있는 반면, 이렇게 동시에 여러 가지 유형이 같이 높은 수치를 보이는 경우 충돌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상담이 시작되었다. '진짜 나를 찾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에 나는 네,라고 답하면서 항상 내 인생은 페르소나와 가면으로 덮여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공감하는 대화가 올 것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상담사 분의 대답은 치명적이었다. '페르소나가 왜 잘못된 거죠? 사람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사용해요. 내가 친구들에게 대하는 것과 상담사로서 대하는 건 다른 가면을 쓰고 대하는 거죠. 왜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는 거죠?'


나는 말문이 막혔다. 온갖 매체에서 '가면을 벗어라, 진짜 나를 찾아라!'라는 일종의 세뇌에 갇혔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상담사분은 '진짜 나를 찾으면 과연 행복해지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답하지 못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진짜 나를 찾기만 한다면 모든 행복과 충만한 삶이 올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모든 건 집단적 최면에 따른 허구였던 건 아닐까? 믿었던 세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충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던 나에게 상담사분은 말했다.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진짜 나는 무엇이냐고. 나는 고민하다가 답했다. 저는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저를 정의하자면 저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수많은 나라들을 떠돌아다니고 여행했어요.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만나면서 떠났을 때 나는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어요. 자유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자유로움인 것 같아요. 지금 행복하지 않은 건 내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선생님은 말했다. '자유가 뭐예요? 자유롭다는 건 뭔가요? 떠돌아다니고 방황하고 이곳저곳 다니면 자유로운 사람인가요?' 마치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처럼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상담사분의 예리한 칼날에 나는 속절없이 베이고 말았다. 당시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뭔가 의도하는 것 같은데 답하지는 못하겠고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나를 변명하고자 계속 말을 덧 붙였다. 제가 말하는 자유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거에요. 돈에서도 자유로워지고, 집착에서도 자유로워지고, 이성에서도 자유로워지고, 아무튼 그 모든 것에서 욕심부리지 않고 살아가는거요. 선생님은 물었다. 돈이 싫어요? 돈 없으면 어떻게 살게요? 부모님이 용돈주면 냅다 받으면서 부모님한테는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집착하지 않으면 성취가 있을까요? 욕심이 없으면 삶의 원동력이 뭐에요? 그게 자유로운건가요?


자유롭다는 건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건가? 왜 자유로워지고 싶은 건가? 나는 아무것도 답하지 못했다. 진짜 나의 모습은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하면서 정작 자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런 내가 진짜 나를 찾는다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유와 성찰 없는 주장이 얼마나 공허한 외침이자 아집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자유는요, 상담자분이 얘기한 게 자유가 아니에요. 상담자분이 말한 자유는 도망치는 거지, 진짜 자유가 아니에요. 상담자분은 도망치려고 하고 있어요. 내가 사는 곳, 내가 속한 곳, 나의 모습, 진짜 나에서. 진짜 자유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인지하는 바탕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지금 상담자분은 바람과도 같아요. 여기서 불면 이리로 날아가고 저기서 불면 저리로 날아가는. 자신의 뿌리와 든든한 토양이 있어야 흔들렸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법이에요.'


나는 도망치는 것과 자유롭다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엄마와 아빠에게서 지독한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국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망할 헬조선을 욕하면서. 공동체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내가 지켜야 하는 의무가 싫어서. 그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남 탓은 쉬우니까. 남 탓을 하고 도망치고 그것을 쿨함과 자유로움으로 포장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건 쉬우니까.


반면에, 내 책임과 의무를 묵묵히 지켜나가는 건 어렵다. 남 탓하지 않는 건 더욱 어렵다. '엄마와 아빠가 나를 이렇게 상처 받은 아이로 만들었는데 내가 왜?'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기업인들이 우리나라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었는데 내가 왜?' 이런 말을 달고 살았다. 변화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두려웠다. 부모님이 비록 나를 이렇게 만들었더라도 나는 묵묵히 삶을 이겨내 결국은 성취했다, 라는 서사를 쓰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핑계 덩어리였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던 자유와 방종, 책임과 의무에 대해 기꺼이 이를 받아들이고 이겨내려는 마음가짐과 의지가 있어야만 했다. 상담사분은 나에게 그걸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건 비겁한 변명이라고, 너 사실은 아무 노력 안 하고 있잖아?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세상이 흔들려버린 나는 충격에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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