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끝자락. 봄 머리에 아직 겨울옷을 입은 채 문을 열자 건물 안인데도 생각보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과 맨손을 만진다. 소름이 끼쳐 재빨리 패딩에 달린 모자를 쓰고 목까지 지퍼를 끌어올린 후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조심조심 계단으로 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난간을 잡고 한 발 한 발 내려간다. 원래였으면 들어갔을 편의점 옆 문을 지나쳐 공동현관 밖으로 나간다.
어둠이 깔린 거리. 세차게 부는 바람 소리가 으스스하다. 눈물이 날 만큼 시린 공기 앞에 다리에 대한 불안은 자취를 감춘다. 봄이 오다가 돌아간 듯한 추위다. 가만히 서서 바깥공기를 느끼자 멍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다 불빛이 덜한 편의점 반대 방향으로 한걸음 한걸음 옮기기 시작한다.
숨죽인 발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깨우자 다리 근육이 기억상실에서 서서히 깨어난다. 저릿한 감각은 남아있으나 굳이 신호를 보내지 않아도 천천히 갈 길을 간다. 안도하며 다리를 툭툭 털자 인생에 다시는 없을 것 같던 희망이 혈관을 타고 올라온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다 사위를 느낀다. 불안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집들도, 주차된 차들도 모두 조용히 자고 있다. 듬성듬성 서있는 키가 큰 가로수의 밤 그림자가 오싹하다. 어깨를 한껏 움츠린 채 땅만 보며 걷는 데 등 뒤로 누군가가 뛰어온다. 순간 목에 힘이 들어간다. 최소한의 각도로 곁눈질하며 고개를 돌리자 작은데 커다란 검정 덩어리가 빠르게 스쳐간다.
‘하…깜짝이야… 죽을뻔했네….’
순식간에 심장이 백 미터 달리기를 한 것 마냥 뛰어댄다. 숨을 고르며 미간을 찌푸린 채 덩어리가 향한 곳을 바라본다. 애써 흥분한 마음을 가다듬는 사이 다리는 나도 모르게 걷고 있다.
걷고 싶었나 보다. 3개월 넘게 제 할 일을 안 했으니 답답했겠지. 마음속으로 다리와 대화하는 데 멀리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끼어든다. 슬쩍 돌아보니 길 건너편에 두 명이 걸어오고 있다. 귀를 열고 그들을 의식하며 아까 그 덩어리가 향하던 쪽으로 속도를 늦춰 걸어간다.
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새벽 5시 50분.
가로등으로 어둠을 밝히는 이른 봄의 새벽. 원래였으면 누워서 넷플릭스를 보고 있을 시간이다.
저들은 이 시간에 운동하는 건가. 이 새벽에 운동하는 사람은 무슨 일로 먹고살까. 지극히 현실적 상상하는 데 어느새 건너와 등 뒤로 바싹 거리를 좁혀온다.
“ 우리 손주, 식당 지낭 옆 골목에 고양이 밥그릇 누가 다 치웡 완전 부에난. 나라도 다시 사당 나둬사주.”
(우리 손주, 식당 지나는 옆 골목에 고양이 밥그릇 누가 다 치워서 화났어. 나라다 다시 사다가 나둬야겠어)
“ 근데 아멩 고양이들 불쌍해도 겅 개인적으로 하지는 마시고 예”
(근데 아무리 고양이들 불쌍해도 그렇게 개인적으로 하지는 마세요)
“ 아니 애들 밥도 못 먹엉 쓰레기 뒤지는 것보단 낫주!.”
(아니 애들 밥도 못 먹어서 쓰레기 뒤지는 것보단 낫잖아)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할머니와 중년 여성이 고양이 토론을 하며 내 옆을 지나간다. 운동복 차림으로 발맞춰 씩씩하게 걸음을 떼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길 끝자락에 다다를 무렵 왼쪽으로 휙 꺾더니 어딘가로 사라진다. 아까 검은 덩어리도 그즈음으로 갔다. 천천히 따라가 그들이 꼬리를 보이며 사라진 쪽을 본다.
해가 뜨기 전 푸른빛으로 둘러싸인 네모 반듯한 건물 꼭대기 층에 연약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온다. 4층짜리 건물이 새삼 높다. 4층이면 높은 건물은 아닌데 지나온 1층, 2층에 집들에 비하면 유행 지난 어두운 노란색 선글라스를 쓴 저 건물은 나름 위압감을 드러내고 있다. 뭐 하는 곳일까. 호기심이 동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곳을 쳐다본다. 순간 터덜터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나서 그대로 몸이 굳는다. 어떤 남자가 나를 지나쳐 건물 입구로 들어간다.
저기, 뭐 하는 곳일까?
눈을 뜨자 하얀 벽이 눈앞에서 무표정으로 이마를 맞대고 있다. 돌아누우며 기지개를 켜는데 모처럼 개운하다. 이불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 덜 깬 눈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1시 반. 놀란 마음에 남아있던 잠이 달아난다. 오랜만에 바깥 기운을 맞아서인가. 내리 6시간을 깨지 않고 잤다. 1년 만에 통잠이다.
결혼한 내 나이 또래 누군가는 신생아를 키우느라 반 좀비가 된다는데 지난 1년 동안 나는 스스로 신생아가 되어 두세 시간 잤다 깨고를 반복해 왔다. 이 신생아는 그 기간 동안 자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서른다섯의 신생아는 깨면서 배가 고파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사다 놓은 삼각김밥을 떠올릴 뿐. 허기를 느끼며 상체를 일으키고 테이블에 있는 오늘의 브런치를 향해 일어난다. 살짝 어지럽지만 괜찮다. 그러나 곧 불어버린 파스타처럼 심지 없는 다리 때문에 주저앉는다.
무릎을 구부렸다 폈다, 발가락을 주먹 쥐었다 폈다, 발목을 꺾었다 폈다, 불안을 쥐었다 폈다 하며 짧은 기합을 외치고 일어난다. 2차 시도만에 성공. 다리의 기억이 돌아오는 시간이 하루 만에 짧아졌다. 조심스럽게 테이블로 가 의자에 앉는다. 오늘의 아침 겸 점심은 참치김치와 참치김치. 입으로 소리 내어 발음한다면 얼굴이 조금은 예뻐질 것만 같은 메뉴다. 봉지를 뜯자 까맣고 통통한 삼각김밥의 자태가 드러난다. 새벽에 봤던 까맣고 작으면서도 컸던 덩어리가 불쑥 떠오른다. 이어서 고양이 밥그릇을 사겠다던 할머니, 그 말에 대답해 주던 아주머니, 나를 스치며 건물로 들어가던 어떤 남자에 대해 생각한다.
새벽 6시무렵 그들은 왜 그 건물로 들어간 걸까. 노란 불이 새어 나오던 4층은 뭐 하는 곳일까. 오랜만에 생긴 호기심이다. 삼각김밥을 씹으며 거대해 보이던 건물의 밤 그림자를 떠올린다.
통잠의 여파가 크다. 새벽 5시가 넘었는데도 잠이 안 온다. 나는 솔로 한 시즌을 반나절 사이에 해치워 버렸다. 이젠 속력을 늦추고 다른 걸 봐야 할 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보기엔 나는 솔로가 최곤데 생각하며 돌아눕는다.
의식이 다리를 향한다. 기능을 상실하자 삶의 화두로 떠오른 다리. 다리 근육을 가동하기 위해 일어나기로 다짐한 후 이번에는 무릎, 발목, 발 순으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 기합 없이 일어선다. 찡한 진동이 있지만 일어서긴 섰다. 짧은 한숨을 내뱉은 후 검정 롱패딩을 입으며 기름져 질끈 묶은 머리 위에 패딩에 달린 모자를 쓰고 끝까지 지퍼를 올린다. 다리를 두 번씩 탁탁 털어주고 어제보다는 자연스러운 걸음과 마음가짐으로 문밖을 나선다.
공동 현관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덜 낯설다. 어제는 느끼지 못했던 바다 냄새가 희미하게 실려온다. 역시나 편의점에서 나오는 형형한 불빛 반대 방향을 향해 걸으며 오늘은 원당봉 입구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 볼까 생각해 본다.
어제 미지의 사람들이 들어간 건물 대각선 맞은편으로 45도 정도쯤으로 보이는 가파른 언덕을 봤다.
양쪽엔 겨울에도 떨어지지 않은 듯한 잎 덕분에 거대해 보였던 공룡 같은 나무들이 좌우를 살피듯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그사이엔 차들과 사람이 나란히 통행할 수 있는 넉넉한 길이었다. 건너가 보니 왼쪽 밑으로 커다란 표지석에 쓰인 원당봉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뒤로는 원당봉 앞으로는 바닷가가 있다며 배산임수를 자랑하던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떠올랐다. 올라가 볼까 하는 용기는 생기지도 않았고 위협적 경사와 음험한 나무 실루엣에 돌아섰다.
거길 가볼까 한다. 입구를 지나 경사를 조금 오를까 생각하며 걷는데 등 뒤로 잰걸음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놀라지 않지’ 하지만 미세하게 심장 박동이 빨리 뛴다. 신경을 등 뒤에 둔 채 기억상실에 걸린 다리에 힘을 주며 걷는다. 사람이 쓱 지나간다. 그 검정 덩어리다. 어제는 뛰었다면 오늘은 종종걸음으로 까맣고 빵빵하다 못해 터질 듯한 패딩을 뒤집어쓴 채 걸어간다. 그 밑으로 드러난 까만 조거 팬츠가 유난히 가늘어 보인다. 어느새 간격이 벌어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삼각김밥을 떠올린다. 오늘도 참치김치를 먹을까. 그리고 4층 건물의 비밀을 생각한다. 짐작 가는 바가 있다. 하지만 확실히 알고 싶다.
그곳이 맞을까?
궁금증을 품은 채 원당봉 입구에 도착하자 어제보다 덜 사나워 보이는 공룡이 양쪽에 도열하여 나를 노리고 있다. 으스스 한 기분에 돌아갈까 하다 천천히 걸음을 떼 본다. 곡소리를 내는 바람이 얼굴을 스치지만 내심 시원하다. 고개를 숙여 경사를 오르는 다리만 바라보며 걷다 보니 남색 빛 하늘이 푸르게 변하며 갈림길을 비춘다.
……
어디로든 안 간다.
이미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호흡이 암벽등반을 한 것처럼 거칠어졌다. 뒤를 돌아 내려가는 데 표지석을 지나 사람이 걸어온다. 나를 신경도 안 쓰겠지만 여기서 돌아가는 게 괜히 창피하다고 느끼는 순간 닭 우는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몇 분 사이에 푸르던 하늘이 연한 잿빛으로 변하며 아침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보름동안의 새벽외출은 삶의 패턴을 점진적으로 바꿨다. 바뀌었던 낮과 밤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고 다리 근육은 기억은 물론이고 의식을 되찾기 시작하여 매일 새벽 나를 원당봉으로 이끌었다. 그 길에서 이름 모를 곳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거의 매일 마주쳤으며, 나의 궁금증과 호기심은 점점 살을 붙여 다리에게 노란 선글라스 건물로 갈 것을 지시했다.
오늘은 처음으로 새벽이 아닌 낮에 나가볼까 한다.
베이지색 야상을 입을까 검정 롱패딩을 입을까 고민하지만 정답은 롱패딩이다
모자는 쓰지 않고 지퍼만 목까지 올린 채 건물 밖으로 나오자 새벽과는 다른 햇빛에 눈이 작아진다. 3월 중순답지 않게 여전히 차가운 기운을 햇볕이 데우고 있다. 한동안 태양을 못 받아 허옇게 질린 얼굴이 모처럼 자연광을 흡수하고 어느새 어깨까지 자란 머리카락이 차분해진 바람에 흩날린다. 근방의 바다 향기가 쌀쌀한 공기를 머금은 채 콧속으로 들어온다. 새벽에는 희미 희미했던 바다 내음이 선명하다. 편의점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직진하면 바다, 편의점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면 원당봉. 순간 바다로 가볼까 하다 어김없이 늘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회색 구름들이 생선 비늘처럼 하늘을 덮고 있다. 시선을 내려 가로수로 향하자 어둠 속에선 위협적으로 보였던 나뭇잎들이 싱그럽다. 겨울에도 떨어지지 않는가 보다.
원당봉에 다다르기 전, 사람들을 흡수하는 미지의 건물을 바라본다. 애초에 흰색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누런 건물 곳곳에 페인트가 벗겨져 있다. 오후 4시. 4층 건물에선 노란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입구에 가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걸어간다.
1층. 건물 입구 오른쪽에 가게가 보인다. 새벽에는 볼 수 없었던 반찬이라고 써진 작은 입간판이 문 앞에 나와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오른쪽으로 자그맣게 원당봉 반찬이라고 쓰여있다. 원당봉 반찬? 두 번 정도 시켜 먹었었다. 맛은 있었으나 밥통과 반찬통을 사야 할 것 같은 번거로움에 더 이상 주문하지 않았다. 목을 빼서 안을 들여다보니 반찬은 있으나 사람은 없다.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건물 입구로 들어간다. 4층은 물론이고 각층에 대한 정보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누군가 마주친다면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며 올라가는데 텁텁하면서도 영적인 향기가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예상했던 장소가 맞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다. 4층 문 앞에 다다르자 열려있는 철문 안으로 반만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살짝 열려있다. 눈높이에 에이포 용지가 두 장이 나란히 붙어있다.
<원당봉 요가원>
수련 시간: 오전 6시~7시
저녁 7시~8시
상담 및 차담 : 저녁 6시~7시
오픈 시간 : 낮 3시~6시 자유 수련
요가 독서 모임 : 주 1회 무료(수요일 2시)
<수련비>
1일 체험 2만 원
주 3회 한 달: 12만 원
주 5회 한 달 : 16만 원
문의 전화 : 010-5222-ㅇㅇㅇㅇ
눈이 재빠르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정보를 입력한 후 날쌔게 계단을 내려가는데 아래서 올라오는 누군가와 마주친다. 아아악! 내 목청에 건물이 들썩인다. 몇 년 만에 질러본 소리인가. 두껍고 드센 내 목소리에 상대방이 날카롭게 응수한다.
“(씩씩거리며) 등록하러 왔수가아아?”
(등록하러 왔어요?)
놀란 마음에 뾰족한 목소리로 묻는 할머니의 말씀에 “아니요!” 작지만 단호하게 대답 후 순식간에 힘이 풀린 다리를 의식하며 뛰어나온다.
새벽마다 마주쳤던 고양이 밥그릇 할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