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독립운동가들과 일본 순사가 밀정하는 자리를 가진 며칠 후였다.
이규식이 신태준을 데리고 가게를 찾았다. 단골들이 언급만 하던 신태준을 실제로 보게 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우리 가게에 발길 한번 준 적 없던 양반이지만 어찌 보면 가장 유명인사라고 할 수 있다.
신태준은 남성들의 평균 정도 되는 키에 곱상한 외모를 풍기고 있어 좋게 말하면 귀공자 같은 느낌을 풍겼고 나쁘게 말하면 기생오라비 같기도 했다. 상고머리에 흰 상의를 입었고, 독립운동가답지 않게 햇빛을 별로 못 본듯한 허여멀건 한 피부가 백면서생(白面書生)처럼 보이는 외양을 더욱 극대화했다.
‘저래서 어디 총이나 쏘겠나….’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들은 노가리에 탁주 2잔을 주문하고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고 멀뚱히 앉아있는 신태준과는 대조적으로 이규식의 표정은 아주 심각했고 말투는 종이에 글씨를 새겨 쓰듯 단호하고 힘이 있었다.
“야, 인마! 내가 너랑 티격태격할 때도 있지만 말이야. 본인이 성장하고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할 때도 있는 법이야.”
“그래 뭐 아무래도 그렇겠지?” 신태준은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받아쳤다.
“네가 하는 일들을 앞만 보고 달려갈 게 아니라 때로는 뒤도 돌아보고 좌우도 살펴야 해.” 이규식은 송충이같이 진한 눈썹과 미간을 찌푸려가며 목청을 높였다.
“좋은 말이네. 근데 뭐 자세히 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하려고 하는 임무가 있어서 그것만 신경 쓰고 나면은 나도 좀 쉴까 하고 있어. 알다시피 내가 보기와는 달리 성질이 불같은데…. 요즘은 힘에 부친다는 느낌을 받거든. 쉴새 없이 달려왔더니 조금 지친 거 같아.” 이규식은 신태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끼어들었다.
“새끼야! 그러면 그 임무 잠시 내려놓거나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그냥 쉬어. 독립운동은 너 혼자서 다 하냐? 가시 돋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인마!”
“어휴 어떻게 그래. 네가 다그치지 않아도 이번 일만 마무리하면 고향에 잠시 내려가서 머리 좀 식히다 올 생각이다. 그래도 고맙다 규식아! 너랑 다툴 때도 있었지만 동료라고 이렇게 챙겨 주네.”
신태준은 잠시 사색에 잠겼다가 생각이 정리됐는지 동료애를 담은 깊은 눈빛으로 이규식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러나저러나 너랑 나랑 동향(同鄕)이잖냐? 나도 한 번씩 몰아붙이듯이 말했던 거는 미안했다.”
“…. 태준아 사람이 항상 정공법으로 나갈 필요는 없어. 때로는 돌아가거나 쉬었다 가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 맡게 됐다는 임무 놓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너 대신 임무 맡아서 할 사람 정도는 알아봐 줄 수 있으니까.” 이규식은 탁주가 든 잔을 들어 마시며 말했다.“그래, 자식아! 생각 있으면 말할게.” 신태준도 탁주를 한 모금하곤 탁자에 올려놓은 노가리를 집어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