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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차 Oct 24. 2021

조용한 아이들과 사랑 표현 주고받기



 교직 2년 차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금요일의 편지>를 썼다. 여러 선생님께서 전달사항이나 준비물, 칭찬 거리 등을 담아 작성하시는 종례 신문을 내 사정에 맞게 변형했다. 아직도 낯선 수업 준비부터 채워야 하므로 매일은 부담되니 일주일에 한 번만 만들기로 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곧바로 어른의 시선이 되어버리지만 최대한 수평적인 눈높이를 맞추고자 애썼다. 조금 더 편지 느낌이 나도록 단문 식 공지사항이 아닌 긴 글로 적었다. 하고 싶은 잔소리가 많지만 꾹 참고 사랑한다는 말을 듬뿍 담았다.


 금요일의 편지를 블로그에도 꾸준히 업로드했다. 나 또한 인터넷에 가지각색 자료를 올리시는 선생님들 덕분에 아이디어와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 늘 궁금했던 게 있는데요. 혹시 금요일의 편지를 쓰시면 나눠주고 같이 읽나요? 아니면 그냥 나눠주나요? 저도 무언가 시도를 해보고 싶은데 가정통신문도 버려져 있는 경우가 있어서 겁이 나서 시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나 역시 신규교사 연수에서 종례신문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여쭤본 질문이 “아이들이 다 읽어요?”였다. 마주 앉은 선생님께선 “아유, 다 읽진 않죠. 어떻게 모든 애들이 다 읽겠어요.”라고 말씀하셨다. “역시 그렇죠?”라고 답하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일부러 시간 내서 적었는데 애들이 안 읽으면 너무 속상하고 허무하잖아!’



 안 그래도 익혀야 할 게 산더미였으므로 일을 벌일 여력도 없었다. 아직 1년 차이므로 기본만 해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9월에 발령받은 나는 한 학년에 세 학급씩 총 아홉 학급의 신설 중학교에서 100% 전입생으로 구성된 1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다. 휘몰아치듯 시간이 흘렀다. 도저히 오지 않을 것 같은 종업식을 마쳤고 숨 돌릴 새도 없이 2월이었다. 무사히 진급시켰다는 안도감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새로운 해의 담당 업무와 담임 학급 발표 시간이 돌아왔다. 나는 속으로 제발 중학교 2학년만 아니길 바랐다. 1학년에 세 학급밖에 없고 수업도 다 들어갔으니 2학년을 맡으면 똑같은 아이들을 만나게 될 터였다. 이미 최선을 다했으니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교직원 회의에서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호명되고, 나의 두 번째 담임 학급은, 제발.


 무심하게도 중학교 2학년이었다.


 이미 내가 가진 패를 모두 보이며 수업을 같이했던 학생들을, 게다가 담인 반이었던 학생의 1/3을 다시 담임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성향을 알고 있는 아이들이기에 어떻게 다가가야 좋을지 고민이 깊어졌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짚으며 3월을 준비하는 동안 다시 종례신문을 떠올렸다. 말썽꾸러기들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한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였다.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잔뜩 밀집한 학교라는 공간에서 눈에 띄는 건 단연 시끌벅적한 아이들이다. 대답을 똑 부러지게 잘하는 아이, 수업 내용과 관계없이 해맑게 농담하는 아이, 선생님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아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아이들은 교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끊임없이 장난치는 말썽꾸러기들한테는 웃겨서든 화나서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름을 부른다. 이런 아이들은 아무 용건도 없이 교무실에 들러 능청스럽게 사탕을 받아 가기도 한다. 시끌벅적한 아이들과 호들갑을 떨고, 사고를 처리하고, 싸움을 화해시키고, 수업 태도에 대해 상담하고, 부모님께 전화 드리고…… 쏟아지는 업무를 정신없이 챙기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난다. 묵묵히 학교생활을 해나가는 조용하고 성실한 아이들은 자꾸 다음으로 밀린다. 



 ‘쟤는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까 믿고 있어도 괜찮겠지.’ 



 믿는데, 믿고만 있다는 게 자꾸 미안해졌다. 한 반엔 서른 명의 아이들이 있고, 담임교사로 만나는 시간은 조례와 종례시간뿐이고, 나의 눈은 두 개며 입은 하나뿐이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틈타 교실에 들르려고 하는데도 갑작스러운 조퇴며 아이들 간의 갈등이며 급한 불부터 끄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결정적으로 준웅이가 또 우리 반이었다. 매사에 무기력해서 마음 쓰이던 아이였다. 시간을 들여 상담하고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네' 또는 '아니오'뿐인 작은 목소리였다. 혼자인 걸 선호하는 아이라면 괜찮지만 이 아이는 확실히 외로워했다. 그렇다고 이 아이만 붙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붙든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엎드린 아이의 자그마한 등이 슬펐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교사와 학생이 만나는 한정적인 시간 속에서 나는 자꾸만 놓치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 학기를 반추하며 마침내 금요일의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A4용지 한 면에는 일주일 동안 있었던 사건이나 감정을 담아 편지를 쓰고, 뒷장에는 노래 추천이나 생일 축하, 학급 설문조사 결과, 추천하는 책이나 윤리적 소비 등 나누고 싶은 것들을 담았다. 학교에서는 도저히 여유가 나지 않아 퇴근하고 나면, 대부분 목요일 밤에 벼락치기 마감을 하듯 편지를 썼다. 금요일에 틈틈이 검토하고 종례 시간 직전에 서른한 장을 인쇄했다.


 물론 모든 아이가 나의 편지에 응답하지는 않는다. 나의 정성과 고민과 애정을 쏟은 편지를 훑어만 보고 대충 서랍에 구겨 넣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은 100% 시끌벅적한 말썽꾸러기들이다. 그러나 묵묵히 학교생활을 해나가는 조용한 아이들은 평상시처럼 조용히 편지를 읽어나간다. 파일에 차곡차곡 편지를 모은다.


 6일은 금방 지나가 버리고 또다시 목요일 밤이 되면 책상에 앉아 우리 반 서른 명의 얼굴을 떠올린다. 제일 먼저 튀어 오른 활기찬 아이들의 이야기와 왈칵 쏟아지는 일주일의 사건사고는 일단 두고 더욱 곰곰이 구석구석을 살핀다. 묵묵히 학교생활을 해나가는, 소란한 일상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는 아이들을 일부러 짚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소개하고 함께 읽고 싶은 시를 고르고 친구 직업을 인터뷰하기도 한다. 수영 강습을 받고 있는데 수영 선생님이 칭찬 없이 지적만 해서 위축된다고, 우리는 서로 칭찬하는 사이가 되자고 비밀 이야기를 속삭이듯 웃음을 건넨다.


 평소 교사를 어려워하던 아이가 금요일 종례 시간에 교탁 옆을 서성이며 "오늘은 편지 제목이 뭐예요?"라고 묻는다. 쉬는 시간엔 늘 엎드려있어서 걱정했던 아이가 책상에 올려놓은 편지를 발견하자 선 채로 집중하여 읽는다. 말 걸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내가 쓴 편지에 적혀 있는 자신의 칭찬을 들고 와서 자기 이야기라고 자랑한다. 편지를 읽는 얼굴을 조심스레 관찰하다가 일말의 미소라도 스치면 흐뭇한 답장을 받은 기분이다.


 읽지 않는 활발한 아이들에 대한 속상함은 놀랄 만큼 없다. 평소에도 자주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다. 보지도 않고 서랍에 구겨 넣지만 이미 나는 너를 관심 있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 애정한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이다. 다만 읽어나가는 조용한 아이들에 대한 기쁨이 아주 크다. 





 돌아오는 목요일이면 또 마감이 있다. 가끔은 너무 바빠 마감을 어길 때도 있고 시험 기간이다 뭐다 각종 핑계로 생략할 때도 있다. 그래도 금요일이면 아이들이 맡겨두기라도 한 것처럼 “금요일의 편지 주세요!”라고 말을 걸어온다. 편지를 통해 대화를 이으며 속으로 생각한다. 사랑한다는 걸 알아주어 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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