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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차 Oct 24. 2021

방향성을 가지기



 교직에 있으며 의문을 품을 때가 많다. 가만히 앉아서 필기하길 원하는 학생부터 매분 매초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학생까지 모두 한 교실에 두는 게 맞을까, 초등학교야 필수지만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 꼭 필요할까, 매해 보고서로 제출하는 교육의 ‘성과’는 과연 누구를 위한 걸까.


 그 끝없는 의문 중 하나가 ‘수준별 분반 수업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가’였다. 내가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수학, 영어 과목은 성적에 따라 A, B, C반으로 나누어 수업했다. 지금은 우수한 학생에게 차별화된 교육을 제공하는 수월성 교육의 부작용에 대한 성찰로 사라져가고 있는 전통이다.


 2020년 통계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급당 학생 수는 유치원 16.7명, 초등학교 21.8명, 중학교 25.2명, 고등학교 23.4명이다. 하지만 이 숫자는 평균일 뿐이다. 우리 학교만 해도 한 학급당 30~35명의 아이들이 빼곡히 앉아 있다. 개별적이고 복합적인 한 명 한 명을 통으로 묶어 수업하려니 나는 ‘보통’ 수준으로 준비할 수밖에 없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에겐 쉽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에겐 어려운 수준이다.


  자율형사립고, 외국어고, 국제고 폐지가 논란이 되는데 나는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현재 학급당 인원수로는 개별 교육이나 심화 교육을 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공부에 흥미 없는 아이가 1교시부터 7교시까지 수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아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안타까울 때도 있다. 공부에 열성인 아이들을 모아두고 깊은 수준의 교육을 하는 게 인재 양성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  



 “꼭 학교를 구분하지 않더라도 한 학교 안에서 수준별로 반을 만드는 건 좋지 않을까? 교육 내용을 눈높이에 맞게 제공하는 건 좋은 거잖아. 거기다 교육 방식도 성취 수준이 높은 아이들은 대부분 조용히 수업하길 원하고 낮은 아이들은 활동하며 배우는 걸 좋아하니까 원하는 방식으로 수업할 수도 있고. 그게 아이들에게도 좋은 게 아니야?”



 고민하던 문제를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잠시 생각하더니 친구가 말했다.



 “교육의 목표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른 것 같아.”


 “응?”


 “교육의 목표가 만약 ‘지식을 더 많이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면 분반을 하는 게 낫겠지. 그런데 교육의 목표가 학생들이 타인과 어울리며 흥미나 적성을 알아간다거나 함께 사는 법을 배워가는 거라면, 다양한 수준의 아이들이 섞여 있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친구의 대답을 듣고 부끄러워졌다. 나는 교육의 목표라는 것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뜻한 말을 먼저 건네는 교사가 되기’, ‘아이들을 이해하는 교사가 되기’, ‘교실 밖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배움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기’라는 다짐은 있었지만 그건 교사로서의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인 ‘교사상’이었다. 아이들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교육의 목표’가 아니었다. 목표에 대한 고민이 없다 보니 결국 내가 학생이었을 때처럼 성적이나 입시로 자연스레 귀결되었다. 수준별 수업을 하면 좋지 않을까 바랐던 마음을 들여다보니 아이들의 만족보다 교사인 나의 만족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연령대가 다양한 철학 독서 모임에 참여했을 때였다. 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10년 후에 나는 이것을 성취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딱 10년이 지나 그 목표를 이루면요, 그건 성공한 게 아니래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다 뭐예요, 요즘은 거의 5년 단위로 새로운 문물과 문화가 쏟아지잖아요. 가치관의 변화도 크고요. 그런데 10년 전 사고 수준에서 정한 목표를 그대로 이뤘다면, 그건 시대에 따라가지 못했다는 거죠.”



 다른 선생님께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이셨다. 



 “맞아요. 그래서 우리 아이에게도 뭐가 되라고 말을 못 하겠어요. 저희 아이가 만약 대학을 간다면 스물다섯쯤 취업하게 될 텐데요, 그게 20년 후에요.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해있겠어요. 그러니까 ‘성취’보다 어떤 변화든 호기심으로 맞이할 수 있는 ‘성품’을 기르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때 나는 열심히 메모했다. 자칫하면 ‘너를 위해서 하는 얘기다, 사회의 기준을 맞추는 게 너에게 편하다’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사랑이란 이유로 혼자 바라고 혼자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기대치를 낮추고, 아니 아예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응시하고 싶었다. 그날의 대화를 떠올리자 아이들의 모습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억울하고 홀가분하고 우울하고 신나고 불안하고 행복하며 제각각 1인분의 삶을 꾸려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나만의 교육적 목표를 갖기로 했다. 내 멋대로 정한 기대를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나는 교육자고, 아이 앞에 펼쳐진 망망대해 앞에서 ‘이런 삶은 어때?’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교사의 ‘이상적 인간상’이 통일될 필요는 없다. 통일되어서도 안 된다. 어른의 역할은 다양한 멋진 사람을 제시하고, 그중에서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현 교육 제도가 ‘공부 잘하는 사람’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하고 있기에 잘못된 것이 아니라 공부 잘하는 사람만을 ‘유일한’ 이상적 인간상으로 제시하고 있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아직 초보 교사인 나는 딱 하나의 교육적 목표만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이것도 알려주고 싶고 저것도 배워봤으면 좋겠지만 욕심부리다 제풀에 지치지 않기 위해서다. 죽도 밥도 안 된 채 어영부영 지나가기엔 너무나 소중한 기회다. 12년의 학창 시절 중 나와 보낸 1년만큼은 ‘이런 사람이 멋지다’라는 하나의 목표를 확실하게 전달하자고 마음먹었다. 


 딱 하나의 목표만 가지려면 다양한 희망 사항이 제외된다. 공부 잘하는 사람 vs. 인사 잘 하는 사람. 이건 쉽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다른 곳에서도 쉽게 인정받을 수 있으니 나는 인사에 무게를 두고 싶었다. 그래서 작년 나의 목표는 인사성이었다. 일단 나부터가 인사 잘 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았고, 우리 아이가 인사를 통해 가볍게 행복을 주고받길 바랐다.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인사는 그날의 첫인상인 동시에 타인에게 가장 쉽게 건넬 수 있는 선물이라고 강조했다. 


 한 해를 마친 지난 2월, 나는 올해의 목표를 한참 고민했다. 청소 잘 하는 학생이 탐났기 때문이다. 인사 잘 하는 사람 vs. 청소 잘 하는 사람. 이건 좀 어렵다. 같이 쓰는 공용 공간을 성심껏 청소하는 학생은 아무리 조용하더라도 반드시 빛이 났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가장 청소 잘 하는 학생의 생활기록부에는 ‘어느 일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학생’이라 적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반가운 인사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사 소리가 우렁찬 반은 교과서를 펴기도 전부터 힘이 났다.


 그렇게 내가 생각하는 멋진 인간이면서 나 스스로도 실천할 수 있는 교육적 목표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코로나19로 텅 빈 교실에서 채팅과 전화만으로 대화하던 5월에 나의 두 번째 스승의 날을 맞이했다. 그리고 드디어 마음에 드는 목표가 생겼다. 내가 정한 올해의 이상적 인간상은 바로 ‘표현 잘 하는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표현이다. ‘표현을 잘 한다’는 것은 풍부한 단어와 행동 꾸러미를 지니고 나의 언행이 타인에게 미칠 영향을 이해하며 마음과 감정을 전달할 말과 몸짓을 신중하게 고를 줄 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는 없다. 학교가 사회로 나가는 연습을 하는 사회화의 공간이라면 학교에서 나와 만나는 아이들은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익혔으면 좋겠다. 사랑이나 행복, 호기심과 감사, 슬픔과 분노까지 표현을 잘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다짐은 지난 5월 15일에 했다. 스승의 날이었고 여전히 등교하지 못한 채 온라인 수업을 하는 중이었다. 교육의 날도 아니고 스승의 날이란 게 어려워서 차라리 슬쩍 지나가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지나온 선생님께 안부 인사 하나 건넬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조회 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오늘은 스승의 날! 전화번호가 있는 선생님께 안부 문자 한 통 보내보세요. 분명히, 단언컨대, 반드시, 반가워하실 거예요. 여러분들은 늘 반가운 존재랍니다.     



 그랬더니 우리 반 요 아이들이 나에게 문자를 전했다. 작년에 수업을 들어가지 않은 학년이라 얼굴도 모르는데, 담임을 맡고도 얼굴 한 번 마주한 적이 없는데 “선생님, 감사해요”라는 예상치 못한 문자가 차곡차곡 쌓였다. 다른 아무것도 바랄 것 없이 이렇게만 큰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전염병의 시대에 급박하게 적응하느라 예민해져 있었는데 지나치지 않는 다정한 한 마디에 마음이 풀려버렸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표현의 힘을 새삼 실감했다.      





 나의 교육적 목표는 표현 잘 하는 사람. 마음에 쏙 들어서 자꾸 되뇌게 된다. 표현 잘 하는 사람이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부터 더욱 표현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이들도 나도 표현하는 즐거움을, 표현 받는 기쁨을 경험하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표현을 통해 미지의 서로를 알아가길 바란다.

 너무 다른 아이들을 한 공간 한 시간에 맞추는 게 힘겨워질 때는 나의 방향성을 생각한다. 표현을 주고받으려면 역시 다양할수록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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