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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Oct 29. 2020

집 나간 아내를 찾으며 철이 듭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페터 한트케

아내를 찾아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30살 남자에게 그 아내가 남긴 편지가 전달된다.

그리고 책에 쓰인 대로 그 편지는 짧고 간명했다.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中

그리고 남자는 찾지 말라는 아내의 말을 뒤로한 채 미국 전역을 돌며 그 아내를 찾아 나선다.

그의 아내는 왜 그토록 모질게 이별 통고를 했으며 굳이 찾지 말라는 남편은 그 먼 곳까지 와서 아내를 찾아야만 했을까?

짧지만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페터 한트케의 작품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우선 이 책을 읽은 소감은 단 하나 '난해하다'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라 그런지 블로그에 서평은 많지만 그다지 공감 가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난해하기는 마찬가지 인가 싶다.

하긴 나 역시 전문 문학비평가가 아니기에 무어라 써야 할지,,,,,,, 그 난해함이 난감함으로 변하는 지금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그 희망을 서술하려 했다."

 페터 한트케

집 나간 와이프를 찾겠다고 나서서 미국에서 알고 있던 외간 여자와 동행하며 육체적 행위까지 서슴지 않는 이가 가진 발전 가능성과 그로 인해 품게 되는 희망은 과연 무엇일까?

그 답을 찾아 쉽지 않은 길을 나선 본다.

먼저 이 소설의 전체적인 플롯은 주인공인 화자와 유디트는 작가와 배우로 만나 서로 사랑하여 결혼을 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권태가 증오로 변하며 서로 폭력까지 행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에 배우자는 집을 나가 미국 뉴욕으로 향한다.

이쯤 되면 남자도 여자도 굳이 서로를 찾을 이유는 없어 보이지만 서로 연락처를 남기며 마치 그 연을 끊기 싫은 듯 장소를 옮겨가며 서로를 찾아다닌다.

그 길에 잠깐 알고 지내던 여자인 클로드와 그녀의 두 살쯤 되는 어린 딸인 베네딕틴과 함께 여행 아닌 여행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그들과는 길이 엇갈리며 헤어지게 되고 마침내 미국 동부에서 시작한 그 여행은 서부 해안가에서 아내인 유디트를 만나게 되고 영화감독 '존 포드'를 만나며 화자와 유디트는 서로를 죽이려 했던 악감정을 풀고 서로 깨끗하게 헤어지게 된다는 다소 어이없는 이야기가 줄거리이다.

정말 동양적 감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이 책 초반부에도 인용되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 속에 개츠비의 순애보를 동양적인 감성으로 이해하기 힘들듯이 말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두 가지만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아니 내게 희미하게 보이는 그 두 가지만 보았다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이다.

하나는 왜 이렇게 소설이 이해하기 힘든가 하는 부분과 작가가 이야기한 주인공인 화가라는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그 희망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이다.


첫째, 이 소설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

우선 소설은 시간적 흐름에 따른 사건이 전개되며 자연스레 재미를 느끼는 일반적인 소설이 아니다.

소설의 가장 큰 화두는 화자와 아내가 왜 그렇게 싸우다 헤어지게 되었고 또 그들은 서로의 연을 놓지 않으며 만나려 했을까이다.

먼저 작가인 페터 한트케는 소설에서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의 문제가 어떤 감정적 충돌이나 사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불안이라는 원초적 감정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 문제의 불안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으며 모든 갈등이 해소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처럼 내용 전개가 아닌 주인공의 심리적 문제 극복이라는 주제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 기존의 소설 읽기와는 다른 형식의 독서가 요구되었다.

다시 정리하자면 인간 내면의 불안으로 인하여 깨진 인간관계 조차 저 멀리 보낼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무의식의 문제를 가깝게는 영. 유아기부터 멀리는 우리 인간들의 집단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따져 들고 있기에 이 소설은 시간의 흐름과는 아무 상관없이 주인공이 그때그때 깨닫게 되는 자신의 내면의 문제들에 대한 답을 우리도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된다.

그 답을 그저 현재의 상황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알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였던 젖먹이 시절 사랑의 결핍에 대한 불안의 문제(특히, 어린 유디트의 딸과 동행하며 깨닫게 된다), 소설'녹색의 하인리히'와 '안톤 라이저'를 읽으며 깨닫게 되는 인간의 보편적 실존, 이틀간 함께 하게 된 화가 부부의 갈등 없는 관계 등 자신의 현재의 문제에 대한 답을 화자 내면의 각성을 통해서 답이 나오기에 나의 머리는 바쁘게 이리저리 다녀야 했다.


두 번째, 이 어이없는 스토리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만큼의 엄청난 성장소설인가 하는 문제.

이 부분은 첫 번째를 어렵게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보너스라 생각된다.(표현이 좀 저렴하긴 하지만) 뉴욕에 도착했을 당시 화자는 미성숙한 인간이었다.

되돌아본 그의 결혼생활은 권태가 증오로 바뀌는 과정 을 걸쳐 이미 파탄지경에 이르지만 그 결혼생활을 깨끗이 정리하지 못하고 먼 타향까지 오게 된 경위 그 자체가 그에겐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이자 반성이었다.

미국이라는 전혀 새로운 환경 속에서 화자는 하나하나 깨닫기 시작한다.

그들이 만나서 싸우다 헤어지지 못하고 서로를 죽이고 싶은 감정을 가진채 산것은 사랑의 결핍에 대한 불안이었던 것을 그리고 그 불안은 나와 내면의 타자와의 삶이 아닌 나와 타자가 우리가 되는 운명공동체로 어울릴수 있는 그런 삶을 통해 해결 할 수 있음을 그것이 바로 인간 실존의 가장 큰 문제인 외로움을 이겨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임을 자각하게 되면서 그렇게 놓지 못했던 화자와 아내와의 질길 인연도 백지장 찢듯이 단 번에 정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파악함으로써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나는 '짧은 책 분량을 이해하기 위한 긴 독서'를 해야 했다. 결국 우리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죽음에 대한 불안. 그것은 혼자가 되면 죽음과 가까워진다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종의 태생적 나약함과 유한성이라는 문제에 기인한 것으로 그 문제에 대한 고독한 싸움이 아닌 '우리'라는 존재의 틀 안 해서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성숙한 인간으로의 성장 그것이 우리 삶의 성장 가능성이오 희망이라는 피터 한트케의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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