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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링 Apr 02. 2021

당신,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있나요?

사랑으로 피어난 솔직함이라는 꽃

 나를 표현하는 말 중 솔직하다를 빼놓을 수 없다. 교회 셀모임이든 직장이든 사람이 모인 그 어디에서라도 나는 솔직하지 않고서야 배길 수 없는 사람이다. 행복한 지 우울한 지는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는, 뻔히 티 나는 게 상대의 민망함이 될 정도의 투명함을 자랑한다. 눈치가 있다가도 없는 성격 탓에 솔직함을 매력 삼아 뽐내다가도, 한 방 먹이는 공격의 도구로 둔갑시킬 때도 있다. 한 마디로 필터링이 없다 쯤 되겠다.  


26,7살쯤 교회 공동체에서 리더를 맡아 활발히 모임을 이끌었는데 나눔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내 마음에서는 이상한 마음만 올라오더라.


이상한 마음이라 함은 보통 남들은 쉽게 거론하지 못하는 악하고 못된 마음들을 의미했는데, 이런 죄를 품었다는 게 부끄럽기보다 아니 내가 이런 사람이라니! 유레카 외치듯 나누고 공감받는 게 더 중요했다. 교회 동생들은 이런 날 두고 이 언니 자존감 알고 보면 제일 높은 사람 아니냐며 때 아닌 토론을 펼치기도 했단다. 그때의 나는 자존감이 너무 낮아 고민이라는 말을 확성기에 대고 동네방네 말하고 다녔는데, 자존감이 진짜 낮은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남 앞에서 쉽사리 드러낼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요지였다.


내가 자존감이 안 낮다고?
잘 못하는 걸 말하는 게 왜?
나는 나의 약점이 그다지 부끄럽지 않은데?


고개를 갸웃하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숨을 들이켜듯 당연스러웠기에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당시 나와 교제하고 있던 친구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든 자신을 크게 부풀려 흠 하나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높은 자존감으로 건강한 마음을 가진 것 같았는데 속을 들여다보니 과대 포장된 평범한 허점투성이에 불과했다.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그에겐 그만큼 어려운 게 없다더라.


 그는 물에서 나는 뭍에서 살 듯 서로가 다른 호흡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니 우린 자연스레 각자의 별로 돌아갔다. 외계인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경험담을 가지고.



 

 나의 눈치 없는 솔직함은 브런치에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케케 때 묵은 감정을 시원하게 밀어 내려보낼 수 있는 브런치가 좋았다. 인정받는 느낌도 종종 들어 주변에게 글쓰기를 추천했는데 반응은 의외였다. 글 쓰는 게 어렵다기보다 나를 쓰는 게 부끄럽다고들 하더라. 잉 뭐가 부끄러워요? 그게 왜요? 또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그 친구가 보면 넌 아직도 그러고 있니 하겠지.

 

그런데 최근 들어 그들이 말한 부끄러움을 몸소 체감했다. 애초에 인기를 얻으려고 시작한 글은 아니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어야 할 텐데, 예수님과 있었던 일을 털어놓은 글에는 꼭 쑥스러움이 뒤따라 왔다. 그리 대단한 영향력도 아닌데 글 하나 올린 걸로 뭐 신경 쓸 게 있다고 계속 좌불안석인가 싶었다.감사하게도 진지하게 읽어주시는 분이 계셔 불안함을 고요히 잠재울 수 있었지만, 신앙이 담긴 글을 올릴 때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패턴에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다가 내 글을 자신의 글처럼 소중히 여겨주는 친구와 대화 끝에 알게 되었다. 은밀한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수준이 높아져서 그랬구나. 일반의 수준을 넘어선 죄를 드러내는 일은 아무리 솔직한 나라도 부담스러웠다. 덜어내고 순화한 내용이라지만 과연 누구라도 이 글을 읽게 되면 나를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죄인이라면 응당 이런 게 맞지 않은가 하는 갈등 안에서 상대 없는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느라 마음이 편치 못했던 거다.


 지금 돌아보니 남들 앞에서 나의 부족함을 자랑하듯 까놓아도 큰 타격이 없을 수 있던 이유는 타고난 솔직함 때문 만은 아니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곁에서 묵묵히 들어주고 받아준 엄마의 평생에 걸친 사랑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던한 우리 엄마는 다정하게 오구오구 해주지는 못했지만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들어주는 우직한 경청을 베풀어주었다. 엄마의 타고난 천성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자연스러움이 나에게는 곧 사랑 그 자체가 되더라.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나를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그 사랑 덕분에 스스로에 관한 어떠한 말이든 남들 앞에서 대담하게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이럴 때 이렇게 느끼고 이런 생각을 했는데~이야기보따리를 한도 끝도 없이 풀어도 엄마는 그저 재밌어하며 물개 박수로 웃어주었다. 내 인생 최고의 방청객이 되어준 엄마 덕분에 나는 멍텅구리 같은 내 존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 엄마는 나를 많이 사랑해주었네. 나는 정말 복 받은 딸이야. 새삼 감사한 오늘이었다.


 앞으로 죄를 지으면 더 심하게 지었지 전보다 덜 지으며 살지는 못할 거다. 죄의 본질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으므로 그 양심의 기준이 상당히 높아졌기에 그렇다. 영적으로 죄를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것도 깨닫게 해 주신 이가 계시기에 가능하지만.


그러니 브런치  상당수에 나의 더러움이 묻어나게  거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순간은 더욱 늘어날 거다. 그래도 나를 받아주신 하나님을 믿고 뻔뻔하게 버티련다. 부끄러운 것도 맞고 부족한 것도 옳지만,  모든 연약함 있는 그대로 품어주시고 용서해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말이다. 그는 우리 엄마처럼, 아니 그보다 더한 사랑으로 나를 긍정해주셨다.  죄를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헌신으로 인해 나를 어디 하나 흠잡을  없는 의인으로 불러주셨고 앞으로도 그리 여겨주신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_골로새서‬ ‭1:22‬ ‭


 자신을 인정하며 살 수 없었던 그 친구와 나는 사실 별 반 다르지 않다. 똑같이 실수하고, 각자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낀다. 누구 하나 잘난 사람이 아닌데도 더 잘 사는 사람은 결국 내가 되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의 존재 여부는 불안한 인생인지 부러운 인생인지를 결정하니 엄마 덕분에 내가 혜택을 본 셈이다.


 오늘도 실수투성이에 죄인 중에 괴수인 나지만,  

남부럽지 않고 남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우리 주님에게 있다.


 당신이 어느 순간 하나님과 같아지려 선악과에 손을 댄 것도 알고 계시고,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게 다름 아닌 당신의 본성이라는 것도 예수님은 전혀 잊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그는 당신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


나는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아 글을 쓰곤 한다.

당신에게 하는 말은 결국 나 스스로에게 전하는 말이다. 나의 죄가 커져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예수님의 마음을 꼭 기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은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실제 한다.
말이 안 되는 사랑이,
오로지 당신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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