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이란 신들의 언어였다

가랑이가 찢어진 그날

by 책글놀

계획은 나에게 신들의 언어였다.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며 움직이는 자들.

아침 6시에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7시엔 영어 듣기.


10분의 공백도 허용하지 않는 자들.

그들은 시간 위에 군림했고,

나는 그들의 존재를 고등학교 때,

전교 1등 친구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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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노트를 꺼내서 오늘 했던 일들을 정리했다

그 후, 다음 수업 교과서를 펼쳐서 예습했다.


쉬는 시간은 단, 10분!

몇 분만에 그것들을 끝냈고,

남은 시간에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놀았고

심지어 매점도 다녀왔다.




그것을 지켜봤던 나는 그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매년 다이어리를 사기 시작했다.

연초가 되면, 계획을 짰다.

기상, 운동, 공부, 독서, 리뷰, 복습...

누가 봐도 1등 코스.


“됐다. 나도 드디어 신의 자리에 입성이다.”


그러나, 매번 2일 차에 무너졌다.

어느 날, 체육 시간에 뛰다가 넘어졌다.

가랑이가 찢어졌는데,


말 그대로.


진짜로.


계획도 함께 찢어졌다.

기상 실패, 복습 실패, 의욕 증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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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랑이와 함께 무너진 1등 루트였다.

그날 이후 나는 선언했다.


"나는 계획형 인간이 아니야. 그런 건 신들만 하는 거야"


이후로 나는 감으로 살았다.

기분이 흐르면 움직이고,

재미있으면 몰입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 하지만 이상하게,




나는 매년 1월이 되면 서점에 있었다.

하이에나처럼 다이어리 코너를 기웃거리고,

기록의 신전에서 예쁜 다이어리를 한 권씩 들고 나왔다.

‘난 계획형 인간이 아니야’라는 말을

누구보다 많이 했지만,

사실은 그 언어를 배우고 싶었던 거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늘 계획의 신전을 맴돌았다.

멀리서 바라만 보면서,

언젠가 들어가고 싶다고

혼자 중얼거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 신전 문 앞에 다시 서 있다.


신처럼은 아니어도,

사람 버전으로 한 번 배워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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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나는,

신들의 언어를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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