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닮은 듯 다른 대만을 느끼러 떠나다.
대만의 감성
2014년 1월의 오래된 여행기를 꺼내 보듯이, 대만 드라마나 영화는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한국이나 일본과 특별히 다르지 않은 풍경.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닌 대만을 여행하게 된 이유는 대만의 드라마와 영화들에서 간접적으로 느꼈던 어떤 감성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번 대만 여행기는 조금 더 이야기에 치우치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드라마) 촬영지를 따라가서 보는 것보다는, 그냥 화면 속 보던 그 분위기를 느끼는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는 우리나라에서도 <너를 사랑한 시간>으로 리메이크되었을 만큼 우리나라와 비슷한 드라마 <아가능불회애니(번역: 연애의 조건)>이다. 첫번째로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대만의 타이베이의 도시 풍경도 우리나라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장난스러운 키스부터 아가능불회애니까지
처음 '대만'이라는 나라를 접한 드라마는 <장난스러운 키스>였다. 중학교 시절, 한국 드라마가 아니라 일본 드라마와 대만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당시 일본 드라마의 입문작은 <꽃보다 남자>였고, 대만 드라마의 입문작은 <장난스러운 키스>였다.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바빴던 내게 이런 해외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된 환경(?)은 신세계였다. 물론 이는 성적 하락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친 것 같지만. 아무튼.
공교롭게도 제일 최근에 본 대만 드라마 역시 <장난스러운 키스>의 주연이었던 임의신이 2011년에 찍은 드라마 <아가능불회애니>였다. <장난스러운 키스>에서 옆집에 사는 장즈슈를 쫓아다녔던 고등학생 샹친은 30대 커리어우먼 어른 여자 청요칭이 된다. 새삼 시간의 흐름을 느끼면서 나는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드라마를 좋아하고 있구나 깨닫게 된다. 재밌는 점은 이 두 작품 모두 대만과 우리나라에서 큰 히트 쳐서, 리메이크되었으나 망한 작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가능불회애니>와 <너를 사랑한 시간>
사실 이 드라마를 처음 보았을 때는, 작품의 매력을 잘 알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각색한 <너를 사랑한 시간>을 보고서야, 드라마의 장점을 찾을 수 있었다. 얼핏 듣기로 <아가능불회애니>는 히트한 우리나라의 로맨스 드라마의 연출과 내용을 참조했다고 한다. 실제 배우 임의신은 한국어를 전공했고, 한국 드라마를 보는 장면도 나온다. 그래서 이 작품을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 굳이 왜라는 생각과 우리나라 드라마의 전공분야라 기대감도 함께 들었다.
왜 그는 고백을 하지 못했나 (과거 편)
<아가능불회애니>에서는 10여 년, <너를 사랑한 시간(이하 너사시)>에서는 그보다 긴 시간동안 이 둘은 서로 친구사이로 지낸다. 믿기지 않는다. 잘생기고 예쁜 이들이 왜 친구로만 지내는지. 이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처음 만나던 순간과 자꾸 엇갈리게 되는 상황이 필요하다.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는 전혀 가치관이 달랐던 남녀가 투닥거리다 보니, 많은 대화를 하게 되었고, 서로의 연애 고민을 털어 놓는 '절친'이 된다. <아가능불회애니>는 친구가 연인이 되는 이 고전플롯을 그대로 따라간다.
고등학교 시절 여자가 한 명 더 많아서 반장이 된 여자 주인공 청요칭과 부반장 리따런은 각각 여자아이들과 남자 아이들을 이끄는 리더가 된다. 이를 토대로 사사건건 부딪치는 사소한 사건들로, 이들의 첫 만남은 첫단추부터 남자-여자로 볼 수 없게 만든다. 반면 <너사시>의 고등학교 시절은 너무 예쁘게만 그려졌다. 둘이 처음부터 굳이 친구인 것이 좀처럼 설득되지 않았다. 한국판이 화면 때깔과 음악은 훨씬 세련되지만 그만큼 감성과 캐릭터의 이유가 빠진 느낌이었다.
왜 그는 고백을 하지 못했나 (현재 편)
<너를 사랑한 시간>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리따런의 엄마와 그녀의 오랜 친구인 연극 연출자 아저씨가 아예 사라졌다는 것이다. 리따런 엄마의 이야기는 <아가능불회애니>의 드라마 분위기를 결정하고 남녀 주인공의 미래를 짐작하게 하면서, 리따런이 왜 고백을 망설이게 되는지를 설득할 보조플롯이었다. 솔직히 이 이야기가 드라마 내에서 지루할 수 있는 부분이긴 했다. 그러나 정작 이 이야기가 빠진 <너사시>를 보니, 드라마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알맹이가 빠진 느낌을 받았었다. 이 외에도 많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를 통해 원작의 매력을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101 타워를 보고,
까오지 만두를 먹고,
타이완 맥주를 마시다.
2014. 01. 06 - 2014.01. 10
여행 이야기로 넘어오면, <아가능불회애니>를 보고 촬영장을 따라가지는 않았다. 그들의 명장면은 대부분 세트장 안이거나 동네 공터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당시에는 이 드라마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많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다. 나중에야 주인공들이 자주 가던 이자카야를 못 가본 것은 아쉬워졌지만, 여행이 끝나고 나서 본 드라마에서 이들이 까오지 만두를 먹는 것을 보고는 좀 반가웠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101 타워를 뒤로 하고, 작은 이자카야에서 술을 마셨지만 나와 함께 간 친구는 관광객 답게 101 타워에 올라 타이베이의 야경을 보았다. 101층까지 오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귀가 먹먹해졌다. 그 곳에서 내려다 본 야경은 옛날 영화 속에서 보던 미국의 모습이 떠오를 만큼 번쩍번쩍했다. 정작 남산타워에서 서울의 야경을 보지 못해서 그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서울 못지 않게 쭉쭉 뻗은 건물들이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높은데서 보면 근사해 보이지만, 정작 대만의 시내를 걷다 보면 마치 서울의 몇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우리의 숙소가 있었던 한국의 명동이라는 시먼역에는 명품점이 있는가 하면, 길거리를 떠도는 개들이 심심치 않건 지나다닌다. 시내 중심도 우리나라처럼 멀티플렉스의 쇼핑몰들이 들어 서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람들이나 길거리의 모습은 서민적이면서 어딘가 아날로그적이었다. 드라마도 우리나라의 몇 년 전 감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대만 풍경도 그런 것 같았다.
<까오지>가 유명한 식당이라는 말은 가이드북에서 읽었었다. 이 곳을 찾아서 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친구가 우연히 이 곳 간판을 발견한 것이다.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오지 않는 여자 주인공을 기다렸던 식당이자 맥주 안주로 자주 포장해 먹던 만두를 시켰다. 중국, 대만을 여행하면 먹어야 한다는 그 만두. 그 만두에는 육즙이 살아있어 그렇게 맛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와 친구 둘 다 만두 속의 육즙이 입에 그다지 맞지 않았다. 두 개 정도만 맛있게 먹고, 결국엔 느끼해져 버린. 다른 곳에서 먹은 새우만두는 맛있었는데, 다음부터 이쪽 계통의 나라로 올 때는 새우만두를 먹어야겠다 다짐했다.
<아가능불회애니> 속 타이완 맥주가 PPL이라면 아마 이 드라마를 본 사람들에게 제대로 광고가 되지 않았을까. 드라마 방영 후 남자 주인공을 맡았던 진백림이 광고모델이 되었다고 하니. 드라마에는 저렇게 생긴 남자 사람 친구와 캔맥주를 마시며 고민상담을 하는 여자들의 로망인 그런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비록 그 장면을 재현할 수는 없어도 맥주를 마시는 일은 당장이라도 실현할 수 있다!
여행 중에 내가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는 빡빡한 여행 일정 끝에 숙소에서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며, 하루 일정을 정리하고 내일을 계획할 때다. 비록 그 친구가 여자 사람 친구일지라도 이런 시간으로 채워진 여행 끝에 우리의 우정은 더욱 단단해졌으리라.
그런데 이 맥주. 맛까지 한국 맥주와 비슷하다. 치파이라 불리는 닭튀김과 함께 먹으니 마치 한국의 치맥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여기서 절대, 매운 맛 좋아한다고 '스파이시?'라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다 된 튀김에 재 뿌리는 격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 매운맛을 내는 고춧가루(?)가 특이한 향을 낸다는 사실을 몇 번의 시도 끝에 알아냈다. 오징어 튀김이든 닭튀김이든 뭔가 맛있는데 이상했던 이유가 바로 저 향신료 때문이었다는 사실.
세계 각국의 드라마, 영화를 보다 보면 나라마다 유행하는 감성이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몇 년 전에 유행했던 작품들이 다른 나라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하고, 외국에서 몇 년 전에 유행했던 작품들이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 읽었던 것처럼 '지금 당장의 유행을 따르기 보다는 창작자가 제일 잘하는 감성의 이야기를 만들면 우리나라에서 아니더라도 먹힐 거다.'라는 말이 공감이 되었다.
나 역시, 가끔 촌스럽고 오글거리지만 따뜻한 감성을 느끼고 싶을 때 대만의 영화와 드라마를 찾아본다. 어떤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기억에 남기보다는, 그 보고난 뒤 기분 좋은 느낌이 좋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번 아시아 편에서는 그런 감성을 담은 공간과 이야기가 있는 대만의 여행 이야기와 영화 이야기를 담아보려 한다.
글. Storytraveller
사진. Storytravel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