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라는 말이 있다. 전기전자, 화학공학, 기계공학. 이 세 학과는 취업이 잘 된다. 나는 전기전자 공학과를 나왔다. 친구들의 예를 보면 절반은 대학원에, 절반은 대기업에 취직했다. 다른 학과 친구들이 기본 1년 이상의 취업 준비 기간을 거치는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빨랐다. 다만 이 좋은 과가 나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20대 중반에는 매일이 불안했다.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언젠가는 나도 기업에 입사하거나 대학원에 가겠지만 그전에 조금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오래 걸리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찾고 싶었다. 그게 무엇인지 도통 보이지 않으니 불안했다. 전공 실험에 들어가면 파트너들은 솔루션을 척척 찾아내는데 나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안 나왔다. 반도체의 원리도, 코딩이 돌아가는 구조도 따분했다. 다른 분야를 찾고 싶었지만 전공을 따라가기에도 벅찼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스물네 살. 세상이 좁아 보이던 나이에 남미 배낭여행을 했다. 남미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어릴 적 ‘틀린 그림 찾기’에서 본 마추픽추에 가고 싶었다.
(참고; 가난한 대학생의 남미 배낭여행기) https://brunch.co.kr/magazine/univ-nammi
그곳에서 나는 사람, 시간, 기후, 문화 모든 것이 한국과 반대인 남미의 매력에 빠졌다. 헌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웅장한 스페인 식민시대 성당 아래에 터만 남은 아즈텍 신전을 보았다. 신전을 이루었던 황금은 모두 약탈되고 돌덩이만 남아 유럽의 성당을 떠받치고 있는 잉카의 흔적을 보았다. 투명 바닥을 통해 희미하게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옛 신전 터처럼, 힘겹게 그 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잉카의 돌처럼, 백인들의 지배 아래 자본주의 최하위 계층으로 전락하여 관광객들의 피사체가 되어버린 원주민들도 보았다. 이 거대한 대륙은 자기 앞가림하기에 바빴던 대학생에게 빈부격차의 실체를 알려줬다.
남미는 세상을 보는 시선을 완전히 뒤집게 했다. 학창 시절 배운 승자의 역사, 인류 진보의 역사 밑에는 약자의 역사, 침략과 수탈의 역사가 있었고 남미에는 여전히 그 아픔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전공에 대한 칭얼거림은 더 심해졌다. 세상에 부조리가 이렇게 많은데 전기공학으로는 가진 자들의 배만 불릴 뿐이라고. 그럴수록 남미를 향한 묘한 끌림은 강해졌다. 어떻게든 다시 남미에 가겠다고 주변에 호언장담을 했다. 코이카 봉사단원으로, 칠레 워킹홀리데이로, 그것도 안 되면 맥도날드 알바로 모은 푼돈 가지고 멕시코로 떠나 산골 호스텔 직원으로. 빈부격차의 실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4학년 2학기 때 ‘라틴아메리카 문화와 예술’ 수업을 들었다. 어느 날 교수님이 ‘중남미 지역기구 인턴 파견’ 프로그램을 알려 주셨다. 외교부에서 매년 두 차례, 중남미에 관심 있는 대학(원) 생들을 대상으로 라틴아메리카 내 국제기구에서 6개월 인턴십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제도였다. ‘DELE B2’에 준하는 스페인 실력을 요구했다. 우대하는 전공은 ‘중남미학, 서어서문, 정치외교, 국제학, 경제학..’ 등이었다. 공대생이 고작 두 달 배낭여행했다고 비벼볼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졸업을 미루고 초과 학기를 등록했다. 시간이 남아돌았다. 친구들은 하나하나 대기업에 붙기 시작했다. 하반기 공채에 지원하기는 싫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코이카에서 주최하는 ‘중남미 ODA(공적개발원조)’ 특강도 들었다. 코이카 봉사단에 넣은 자기소개서는 떨어졌다.
여유로웠던 11월 어느 날. 남미에 가기 위한 푼돈을 모으던 중에 지역기구 파견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외교부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2018년 상반기 지원자를 모집 중이었다. 엊그제 DELE B1 (B2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을 막 치르고 온 터라 기대 없이 공문을 열었다. 십여 개의 기구 중 ‘에너지 관련 전공자’를 우대하는 ‘라틴아메리카 에너지기구’가 보였다.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다시 가슴이 뛰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더 이상 여유 부릴 수 없겠구나. 나는 이 프로그램 준비에 모든 힘을 쏟기로 했다.
나는 지금 라틴아메리카에너지기구에서 인턴으로 일한다. 중남미 카리브 26개 회원국의 에너지 정책, 통계를 수집하여 각 나라가 참고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당장 이 일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인턴과 언어라는 한계 속에서 해볼 수 있는 일도 많지 않다. 그러나 방향은 맞게 들어섰다고 본다. 공학을 공부하며 끊임없이 들었던 의문들, 나의 공부가 약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 질문의 해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만약 남미에 오지 않고 곧바로 취업 준비를 해서 취업에 성공했다면 매일매일 자괴감 속에서 몸부림쳤겠지. 그렇게 싫어했던 전공 덕분에 다양한 경험을 누리고 있다. 대한민국과 정 반대편에 있는 이곳에서 생활은 결코 쉽지 않다. 수시로 외로움이 찾아온다. 직원들과도 말이 안 통해 꿀 먹은 벙어리마냥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결국 좋은 기회를 얻은 데 비해 준비가 덜 된 나를 자책한다. 그럴 때마다 이 국제기구 인턴십을 간절히 꿈꾸었던 그 해 겨울을 떠올린다. 여기서 일하는 미래를 상상했던 나를 떠올린다.
미래는 여전히 막막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최고로 잘할 수 있는 분야는 어디일까. 20대 중반에 했던 고민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국제기구 인턴십 한번 했다고 진로를 탁 정하는 놀라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일이라는 건 아주 가끔씩 산발적으로 생겨났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또 새로운 도전이 하고 싶어 졌다. 배낭여행이 끝나니 남미에 관심이 생겼고, 관심이 생기니 스페인어를 공부했고, 공부하다 보니 국제기구 인턴으로 에콰도르에 와 있는 것처럼.
먼 미래는 복잡하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 언젠가 스파크가 팍 튀는 그 지점에 다음 스텝이 있을 테다.
다음 편에서는 인턴십을 준비했던 구체적인 과정을 남겨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