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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ernalYoung Sep 05. 2018

유토피아를 찾아서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14 Lee Bul 이불> 전 감상문


 이번 전시 작품이었던 <태양의 도시>와 <새벽의 노래>에 앞서 이불 작가의 <낙태 Abortion>, <화엄 Majestic Splendor>, <사이보그>시리즈, <나의 거대서사> 같은 과거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읽다보니 이불작가의 지향점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된다. 처음 그녀는 감각에서 감각으로 전달하는 방법으로 여성과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해 반문하고 저항해 왔다. 그녀는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이상’의 허구성을 폭로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불작가에게 있어 ‘이상’의 허구성은 더 이상 여성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근대사회 전체로 확장되었다. 이불작가는 조금 더 세련된 방법으로 ‘이상’의 실체를 구현하여 감상자 스스로 그것에 대해 깨닫도록 한다.


<태양의 도시>


 첫 번째 작품 <태양의 도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철학자이자 공상적 공산주의자 였던 톰마소 캄파넬라의 저서 『태양의 도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유토피아론의 고전인 책의 제목을 사용하여 노골적으로 유토피아를 제시한다. 어둡고 넓은 전시 공간 안에서 사방에 거울을 설치하고 바닥에는 유리조각들을 깔았으며 입구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대각선 지점에 CIVTAS SOLIS(태양의 도시) 모양의 전구들이 불규칙적으로 깜빡이도록 하였다. 사방에 있던 거울들로 인해 공간이 실제보다 넓어보였고, 차가운 금속 재질감의 유리조각들은 마치 북극의 금이 간 채 바다에 떠내려 오는 빙하들 모양으로 보였다. 얼핏 조각들이 불규칙적이어 보이지만 대부분의 조각들이 가로와 세로의 길이차이가 많이 나고 날카로운 끝 부분들이 전구 쪽을 향하고 있어 작가가 그녀가 제시한 유토피아로 관객들을 이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심하며 바닥의 조각들 사이를 지나 그녀의 유토피아로 가니, 난색 계통의 전구를 통해 색감과 온도감에서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전구들이 깜빡이고 있어 희망을 제시하는가 싶다가도 지나친 완벽과 낙관을 경계하려는 듯 했다. 


 두 번째 작품 <새벽의 노래>는 중세에서 16세기까지 유행했던 양식으로 보통 이루어지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의 극적 표현으로써 새벽의 이미지를 차용한 “오바드(Aubade)"의 개념을 담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모더니티의 상징물인 힌덴부르크 비행선(Hindenburg Airship)의 기체 구조 등에서 시각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공중의 설치물에는 무채색인 흰색과 연한 회색을, LED 조명에는 선명한 붉은색을 사용하였다. <새벽의 노래>는 힌덴부르크 비행선을 작가의 상상을 통해 재구성한 듯 했는데 대각선으로 공중에 설치된 반쪽짜리 비행선의 선체가 뒤로 갈수록 파편이 흩어져 시선이 분산되도록 구성되었다. 또한 연기는 가장 앞쪽이자 밑에 있는 부분에서 나와 서서히 기체 내부를 채우고 마침내 전시공간을 가득 채웠다. 처음 연기가 나왔을 때에는 연기가 비행선 파편들 사이의 공간을 메워서 기체 표면에 있던 연회색 무늬들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표면의 무늬들이 앞서 <태양의 도시> 작품에서 바닥에 있던 길고 날카로운 조각들을 떠올리게 하였다. 두 번째 연기가 나왔을 때는 기체와 전시공간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 조명과 표면의 무늬들만 보이게 되었다. 그 모습이 흡사 심해에 잠들어있던 아틀란티스를 발견한 모습처럼 느껴졌다. 작가가 맨 처음 의도했던 위와 아래, 기체의 내부와 외부 같은 방향성과 경계가 사라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마지막 연기가 나왔을 때에는 마침내 전시공간을 연기가 가득 채워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약간의 두려움마저 생겼다. 이때에 작품은 연기 속에서 자신의 신체를 모두 잃고 채도가 높은 붉은 빛의 조명만을 가지고 있었다. 연기 속에서 발견한 그 빛들은 모두가 방향성을 잃은 그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그 ‘방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변화해가는 <새벽의 노래>를 보며 영화 <설국열차>와의 유사점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영화 <설국열차>에서 기차를 근대성의 해부자인 마르크스의 기차로 가정했다. 마르크스는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1950)에서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다.”라고 했다. 그러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관련 노트들>에서 벤야민은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라고 했다. 마르크스조차 진보에 대한 맹신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설국열차>가 마르크스와 벤야민의 논쟁으로 보이겠지만 열차는 탈선하여 멈추고 두 아이만 남고 모두 죽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낙관도 체념도 아닌, <설국열차>의 감독 봉준호의 현실인식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이 <새벽의 노래>와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새벽의 노래>가 <설국열차>의 뒷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추락한 비행선과 탈선한 열차라는 당시 가장 발달한 교통수단이자 근대성의 상징이 두 작품의 접점이다. 그러나 두 아이만 남고 모두 죽은 영화와 달리 이불작가의 작품에서는 관람객 모두가 살아남았다. 또한 작품을 통해 각자의 유토피아를 생각하며 각자의 시공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여기까지 작품을 감상하였을 때에는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던 아름다움과 시각적 자극에 의해 작품이 가지고 있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새벽의 노래>에 있던 조명들이 에스페란토와 모스부호를 재구성한 텍스트들이었다는 설명을 읽었을 때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작가는 중세와 근대사회가 꿈꾸었던 유토피아에 대해 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완벽을 자부했던 인간의 오만함을 말했다. 세계공통기호이지만 단언컨대 나와 같이 전시공간에 있었던 그 누구도 <새벽의 노래>에 있던 에스페란토와 모스부호를 읽어내지 못했음이 대표적 증거이다. 그러나 과연 작가가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까지 조롱한 것인가는 의문이다. 끊임없이 작품을 통해 경계를 그어 구분 짓는 것을 거부하고 이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해 온 작가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을 조롱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활동 역시 유토피아를 위한 노력에 기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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