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란 같은 소리 말고
맥락 없는 질문이지만, 일상이 없는 자에게는 꽤 무게감이 있는 질문이다. 일상이 없다는 것은 주로 정말 바쁘게 살아서 숨 쉴 틈도 없는 자들을 위한 말이지만, 이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했거늘, 먹기는 잘 먹는데 일은 하지 않는 삶.
우리는 이것을 백수의 삶이라 부르기로 했다.
백수가 왜 백수인지 알고는 있는가.
이 또한 백수이기 때문에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이다. 백수라 하면 직관적으로 하얗다는 의미의 흰 백 자에 한 번 쉼표를 찍을 것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에 두 번째 쉼표를 찍고는, 수라 하면 떠오르는 손 수 자를 가져와 일하지 않아 손이 깨끗하여 백수로구나 할 것이다.
그러나 백수의 수는 머리 수 자를 써서, 머리가 희끗해질 때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놀고만 있는 선비를 놀리는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손 수 자가 백수에 조금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나는 무언가에 오래 집중하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흰머리가 나던데.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언젠가는 제 나이보다 이르게 온 머리가 희끗해질 터인데. 그러면 백수라 하기에는 너무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산 것은 아닐까.
되레 너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깥에 나갈 일도 없어서, 손이 탈 일도 없어질 정도의 삶을 사는 것이 현대적인 백수에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솔직히, 이런 생각도 백수니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평생 이렇게 먹기만 하고 놀기만 하는 삶을 살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현실적으로 그런 삶을 유지할 돈이 없다는 이유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렇게 꿈이 없는 사람은 원래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도 한 때는 열심히 일함에 희열을 느끼던 적이 있었던 사람이라서 말이다.
그런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누워있기도 힘들 정도로 허리가 배길 즈음, 일이 생겼다. 일이 났다거나 일이 터진 것 말고, 진짜 할 일이.
쓸모 있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헛된 설렘과 기대는 당장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단돈 이십만 원이 문제라기보다는, 아니 이것도 문제지만. 누군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나를 찾아주었다는 것이 진짜 문제인 것이다.
김춘수 시인도 그리 말했지 않나.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가 꽃이 되었다.
물론, 모든 현실은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항상 비참하고 참혹해서, 내일 새벽에 내가 처할 상황도 내가 예상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거부할 수는 없었다. 형용할 수는 없지만 어쨌건 간에 나는 이미 온 마음으로 오케이 사인을 전송하고 있었으니까.
무엇이 그토록 나를 뛰게 만드는 것인가.
평소라면 문자 답장 하나, 지원서 제출 한 번에 수분 수시간을 허비하며 고민하는 그런 나를. 있던 스케줄까지 다 이리저리 비틀어가며 뛰어가게 만드는 것일까.
무책임하고 개념이 없대도 할 말은 없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니까. 언젠가부터 조금은 마음 가는 대로 막살아야겠다는 아무 근거 없는 다짐을 한 순간부터는 나는 더 무책임하고 더 개념이 없어졌다.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한데. 돈이다.
이미 6개월이 넘도록 더 해지는 것보다 빠지는 것이 많은 삶을 살다 보니, 어느 순간에서든 돈은 예전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이 되었다. 그토록 내가 혐오하고 바라지 않던 그런 삶이 된 것이다.
지금 상황도 너무나 그러한 것이, 이틀 동안 내가 일하지 않고 그대로 스케줄을 소화했다면 족히 몇십만 원이 넘는 돈이 통장에서 빠져나갔을 터이다. 하지만, 몇 번의 사과와 스케줄 변경에 애를 쓰면 이틀 동안 오히려 이십만 원에 가까운 돈이 통장에 쌓이는 것인데. 절대 그 약속들이 가볍다거나 무가치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도 그 약속들을 유지하려면 나는 더욱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혹자는 이런 내 심경을 보고 돈이라도 쥐어주고 싶을 정도로 가엾게 여기거나,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상놈이라 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저 지금 집에 들어가는 길에 예정에도 없던 편의점 유부초밥과 컵라면을 살 현실의 여유가 생겼음에 기뻐할 뿐이다.
그렇게 점점 몰염치해져 가는 것인가. 돈으로 만드는 마음의 여유라니. 끔찍하다 정말.
어찌 되었든, 내일은 새벽에 부리나케 일어나야 한다. 이런 나에게 이틀에 이십만 원이나 쥐어줄 그 일을 하러 가야지.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미안해지는 밤이다. 그래도 오늘의 잠자리는 조금은 더 따스하지 않을까.
어딘가 모르게 쓸모가 조금은 자라난 것 같은 기분이라서.
- [쓰임새, 외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