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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내가 아니면 누가 그 앨

사랑이 기다리는 집으로

by 제노도아

문해교실 수업이 끝날 무렵,

항상 제일 먼저 가방을 정리하는 어르신이 있다. 흰머리를 정갈하게 빗어 넘긴 은백자님이시다.

은백자님은 다른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눌 때면, 늘 미소로 인사하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동생이 기다려요. 저 먼저 갈게요.”

그 한마디가 갑게 여운을 남긴다.

은백자님은 예순 중반이 된 막내 남동생과 함께 사신다.

적장애가 있어 마음의 나이가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쯤에 머문 동생.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십여 년 전부터, 동생은 단 한 번도 누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동생은 엄마, 아버지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종일 문 앞에서 기다리기만 했어요. 그걸 보서 제가 대신 엄마처럼 되자고 결심했어요.”

은백자님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의지가 댕돌같다.

이제 동생은 누나의 발자국 소리로 하루를 맞고 끝맺음한다.

은백자님이 문해교실로 향하면 동생은 늘 창가에 앉아, 같은 자리에서 기다린다.

누나, 언제 와?”

그 물음엔 사랑과 불안이 한데 섞여 있다.

은백자님이 외출할 때, 잠깐씩 남편과 함께 있지만 눈길은 늘 누나에게만 머문다.

그래서 은백자님은 수업이 끝나면 곧장 버스정류장으로 향하신다.

'같이 놀러 가자, 함께 밥 먹자'하는 다른 어르신들의 권유를 미안한 웃음으로 뒤로 한다.

죄송해요. 저는 얼른 집에 가야 해요. 그 애는 제가 없으면 밥도 잘먹어요.”

은백자님은 동생을 늘 그 애라고 부른다.

동생을 아이처럼 부르지만, 그 말속엔 지친 기색보다 따사로운 정과 깊은 책임감이 담겨 있다.

십여 년 동안 계속 그랬다.


어르신들은 먹을 것을 나누면 동생 갖다 주라며 더 챙겨서 은백자님에게 주신다.

은백자님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돈이 많지 않아도, 시간에 쫓겨도, 은백자님의 하루는 언제나 동생 돌봄으로 채워진다.

어쩌다 어르신들이 힘들지 않냐고 물으면, 은은한 미소로 대답하신다.

“힘들 때가 있죠. 치가 있는데 주일에 두 번씩 목욕을 시키고, 이해할 때까지 여러 번 설명도 해야 하고요. 근데요, 그 애가 나 보면 좋아서 싱글벙글 웃어요. 나만 믿고 따라요. 런 모습을 보면 다 괜찮아요.”

그 말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랑은 그저 오늘도 함께하는 일상을 지켜내는 꿋꿋함이라는 것을 은백자님은 몸소 보여 주신다.


은백자님은 수업 시간에도 참 성실하시다.

받침 하나, 띄어쓰기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

"나라도 열심히 배워야, 그 애한테 뭐라도 읽어줄 수 있잖아요.”

그 말에 교실은 잠시 조용해지고, 모두의 눈빛이 봄날처럼 따뜻해진다.


구는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베푸는 사랑을 남긴다.

은백자님의 삶은 동생과 함께 두 번째 막을 열었다.

부산스럽지 않고 담담한 모습에 보는 이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은백자님은 조용히, 단단하게, 하나의 생을 보듬으며 끌어안는 사랑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문해교실 문을 나서는 은백자님의 뒷모습에, "누나!" 하며 달려 나와 갑게 맞는 동생의 웃는 모습이 겹쳐 보인다.

하나의 길에 두 사람의 발자국 나란히 새겨진다.

그 길 위에 사랑의 돌봄이 고운 꽃잎으로 뿌려진다.

은백자님과 마음을 함께 나누시는 어르신들이 모두 은백자님의 마음속 후원자이시고, 봄빛 응원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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