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은 울리지 못했지만 마음은 울린 날
"날이 참 좋네, 가을하늘이야."
"날만 좋네, 난 떨려서 하늘도 안 보여."
"왜 그려. 뭐 하나 보러 가는 거지 잘하려고 가는 거 아니잖여."
"그럼 다 경험이지 새로운 경험!"
여러 문해학교 학생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는 버스 안의 모습이 각각 다르다.
처음 도전은 낯설지만 설렌다. 나이와는 상관 없는 첫 경험의 떨림.
우리 어르신들에게 ‘골든벨’은 낯설고도 설레는 시간이다.
다른 문해학교는 중등과정까지 있어서 연령층도 4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해 학교라고 불리지만, 우리는 문해교실이다.
우리 반은 인원도 적고 연습할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다.
더구나 달달 외워야 하는 암기가 쉬운 연세는 아니다.
같은 문해반인데도 몇 달이 지나면 실력 차가 확연히 드러난다.
글자를 더듬더듬 읽으셔도 쓰지는 못하시는 분,
틈만 나면 쓰고 또 써서 책을 술술 읽으시는 분,
틀린 글자를 수십 번 쓰고 또 써서 달달 외우시는 분,
받아쓰기 시간이 긴장감이 있어 즐겁다며 기다리시는 분,
함께 배우는 것이 좋아서 수업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며 오시는 분...
어느 분 하나 거짓이 없으며 배우려는 열정이 진실하다.
어르신들 말씀대로 새 경험 삼아 참여하는 것이지 기대를 걸고 온 것은 아니다.
배움의 길을 늦게 시작한 만큼 걸음은 더디지만, 대회장 앞에서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반짝인다.
화이트보드를 받고 보드 마커를 쥐자 긴장 속 셀렘이 가득하다.
어르신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와아, 사람들 좀 봐."
"많이도 왔네. 저긴 다 사오십대 젊은이들이야."
"분홍, 노랑, 파랑 다 학교가 다른 거잖여."
“이런 데 온 건만으로도 어디야."
첫 번째 문제가 화면에 뜬다.
첫 문제부터 쉽지 않다.
어르신들은 긴장으로 손끝이 덜덜 떨린다. 글자가 희미하게 떠오르다 이내 사라져 버린 듯하다.
“아이고, 알았는데 생각이 안 나네.”
“분명 배운 건데 헷갈려.”
"나 저거 분명 봤는데 뭐지 뭐였더라."
"난 머릿속이 텅 비었어."
"그냥 아무 거나 생각나는 대로 써."
조용히 하라는 사회자의 말을 뒤로한 채 수군수군, 어르신들의 말들이 오간다.
한 문제, 두 문제... 안타깝게도 몇 문제 지나지 않아 우리 반은 모두 탈락했다.
어르신들의 얼굴에 속상함이 묻어난다. 너무 일찍 내려와야 하는 아쉬움이 크다.
순간, 정적이 흘렀지만 곧이어 어르신들 사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탈락자석으로 내려와 앉은 어르신들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다.
“그래도 나는 한 문제는 맞혔어."
“이 나이에 이런 곳에 오다니 그걸로 만족해."
“맞어. 이런 데 와본 것만 해도 좋지."
"내 팔자에 이런 날도 다 있네.”
“하하하, 손주들한테 자랑해야겠다.”
낯선 곳에서 당당히 앉아 문제를 푼 자체가 값진 경험이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응원석에서 열심히 손뼉을 치며 다른 학교 학생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참 따뜻하다.
그 온기 속에는 수십 년 동안 글자를 몰라 겪어야 했던 서러움이 녹아 있다.
버스 번호를 외우지 못해 늘 같은 버스만 기다리던 날들,
아이들 숙제를 봐 주지 못해 몰래 눈시울을 훔치던 날들,
병원에서 약 봉투조차 읽지 못해 손에 쥐고만 있던 날들….
그 모든 날들을 지나 오늘, 골든벨에서 열심히 문제를 풀었던 것이다.
비록 초반 탈락이었지만, 어르신들의 가슴에는 또렷하게 종소리가 울렸을 것이다.
대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어르신들은 말씀하신다.
“다른 학교 학생들 참 잘하데.”
“우리보다 공부 많이많이 했나 봐. 끝까지 남은 나이 든 이도 있었어.”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며 끝까지 응원한 것이야 말로 진짜 골든벨이다.
버스 안에서 어르신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다짐하신다.
“내년엔 더 열심히 해서 오래 남아 있어야지.”
“같이 열심히 해 보자고!”
그 말속에는 단순한 승부가 아닌, 배움 앞에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골든벨의 종은 우리를 위해 울리지 않았지만, 어르신들의 마음속에서는 선명한 종소리가 담겨 있다.
그 종소리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크게 울려 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