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마다 피어난 봄, 우리들의 시화전
"이거 정말 교실 밖에 전시하는 거 맞아요?"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우리 거 보는 거지요?"
"아하, 몇 번이나 말해! 선생 입 아프겠어. 그냥 쓰기나 해."
교실 안은 평소보다 더 활기가 넘친다.
종이를 펼쳐 놓고 색연필 고르는 손끝이, 오늘따라 조금 더 조심스럽다.
교실 바깥의 작은 전시 공간에 놓을 시화전을 앞두고, 어르신들의 설렘이 교실 가득 묻어난다.
"내 글씨는 왜 이리 삐뚤어, 다시 쓸까?"
"꽃 색깔이 너무 진한 거 아녀?"
서로 묻고 웃으며 글씨를 고쳐 쓰고, 정성스레 그림에 색칠한다.
시화전을 앞두고 어르신들의 눈빛은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빛난다.
한 자 한 자 글자를 완성할 때마다, 색을 칠할 때마다 뿌듯함으로 얼굴이 점점 환해지신다.
글을 몰라 늘 남에게 묻고 살았던 긴 세월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준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했던 어르신들.
그 어르신들이 시를 쓰시고 그림도 직접 그리신다.
시 내용과 상관없이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며 참 즐거워하신다.
반듯한 액자에 넣어서 전시되는 그림이지만, 마음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색깔도 자연의 색과는 좀 다르지만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이기에 상관없다.
종이 위에 당신 손으로 직접 쓰고 그린 것이 작품이 된다는 것만으로 어르신들은 너무나 가슴 벅차하신다.
글과 그림은 대부분 어르신들의 성격이나 모습과 비슷하다.
구슬옥님은 글자 하나가 틀려도 지우개보다는 종이를 바꿔 다시 쓰신다.
버럭순님은 선을 죽죽 긋다가 틀리면 '에이!' 하시곤 지우개로 박박 지운다. 자국이 남아도 신경 쓰지 않는다.
고운정님은 색을 고르고 또 골라서 조화롭게 그린다. 당연히 분홍색이 주를 이룬다.
꽃잎화님은 그림이 대담하고 화려하다.
금향님은 글씨와 그림을 차분하고 조심스레 대한다.
흥미로운 것은 어르신들이 즐겨 입으시는 옷 색깔이 주로 그림 색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시를 쓰고 다듬는 것은 지난 시간에 마무리했다.
이제 그 내용을 A4 용지 크기의 흰 종이에 옮기고 그림을 그리는 건데 시간이 꽤 걸린다
"글씨를 좀 더 크게 쓰시고, 제목 옆에 성함도 꼭 쓰세요."
내가 어르신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잔소리한다.
"엥?이름까지 쓰라고. 그럼 내 글씨 엉망인 거 아는 사람이 보면 어쩌게."
명랑희님이 쓰던 것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신다.
"이렇게 잘 쓰고 그리셨는데 자랑을 하셔야지요. 어르신들은 모두 시인이세요."
나는 명랑희님의 종이를 살짝 들어 올린다.
"잘 썼구먼, 나보다 훨씬 낫구먼!"
"처음에 내 이름도 석자도 못 썼는데 이만하면 일등이지 뭐."
"맞네 맞아. 우리 다 같이 뽐내봅시다요."
박수와 함께 유쾌한 웃음이 시원하게 쏟아진다.
우리 교실에는 각자의 빛깔이 있다.
어떤 분은 말수가 적지만 성실하게 수업을 지탱해 주고, 또 어떤 분은 웃음소리로 활기를 더한다.
드디어 손주맞이처럼 설레며 기다리던 시화전 날이다.
어르신들은 나들이 갈 때처럼 곱게 꾸미고 일찍 나오셨다. 책상 위에 알록달록 액자들이 세워졌다.
ㄷ형 공간의 책상 위에는 시화전 액자와 그동안 배운 결과물들이 색색 파일에 들어 있다. 파일을 열면 한 장 한 장씩 그동안 배운 흔적이 살아난다. 어르신들은 신기한 듯 감탄을 하신다.
"와아, 이렇게 꾸며 놓으니 진짜 멋지네."
"여기서 요렇게 요렇게 사진 찍어야지."
어르신들은 손가락을 V자로, 하트 모양으로, 때로는 귀요미 표정을 지으며 각자의 액자와 전시물 앞에서 자세를 취하며 한껏 즐거워하신다.
작품 앞에서 발을 돌리지 못하고 서 계시는 몇몇 어르신들의 표정에는 떨림과 설렘이 동시에 피어난다.
"이렇게 해 놓으니 정말 그럴싸하네."
"으쓱으쓱, 어깨춤을 추세."
"다들 수고했네."
서로 격려하고 기뻐하는 모습에 보는 이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한 분씩 당신의 시를 읽을 때는, 마이크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목소리가 흔들렸지만 그래도 괜찮다.
한 글자 한 글자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배우지 못해 답답했던 지난날이 겹쳐지고 결국에는 해냈다는 기쁨이 눈가에 맺힌다.
발표를 마치자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온다.
그 박수는 그냥 격려가 아니다.
오랜 세월을 넘어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는 어르신들에 대한 존경과 축복이다.
어르신들은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축하하신다.
“우리도 시인이 될 수 있어.”
“세상에, 내가 저 거를 썼다는 거 아녀.”
그 말은 단순한 자랑이 아니다.
글자 몰라서 버스를 잘못 타고, 이름 석 자 못 써서 도장을 대신 찍던 세월이 얼마였던가.
그 시간을 건너와 드디어 스스로 글을 쓰고, 그 글을 사람들 앞에서 읽어낸 날.
그것은 개인의 작은 성취가 아니라, 삶의 한 장을 뒤집는 큰 사건이다.
시화전을 둘러보고 집으로 가시는 어르신들의 발걸음은 가뿐가뿐하다.
글과 그림은 전시장에 남았지만, 가슴속에는 ‘나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환하게 자리 잡는다.
어르신들의 눈빛 속에 어린아이 같은 환희와 세월을 이긴 자부심이 동시에 빛난다.
시화전은 한 편의 잔치이며, 삶의 두 번째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