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가 손을 맞잡은 하루
창문을 열면 바람이 상큼하다.
아침 공기는 대낮의 뜨거움을 잊고 선선하게 다가온다.
아침저녁 바람결에 제법 가을향이 묻어난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꽃잎화님이 묻는다.
"선생님, 오늘 누가 온다고 했어요?"
지난 시간의 설명이 교실 밖으로 나가면 대부분, 머릿속 지우개로 쓰윽 지워진다.
"고등학교 사회탐구 동아리 학생들이 옵니다."
내가 큰소리로 대답한다.
"왜요?"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 눈이 커지신다.
어르신들 가운데 기억하는 분들이 말씀하신다.
"어이 참, 노인네들 편하게 해주려고 물어볼 게 있다잖아."
구슬옥님이 뒤를 돌아보며 말씀하신다.
"아참, 그랬지. 호호호. 돌아서면 잊어버려."
"그래도 누가 온다는 건 기억했으니 됐어."
아침부터 유쾌한 웃음이 교실 안을 채운다.
건강 박수 치고, '오늘도 사랑합니다!' 크게 외친 뒤 수업을 시작한다.
우리 교실에는 밝은 웃음과 글자를 익히는 설렘이 늘 함께 머문다.
그런데 그 공간이 조금 더 환하게 빛나는 시간이 있다.
사회복지사 실습 학생이나 고등학교 동아리 학생들이 찾아오는 날이다.
낯선 젊은이들을 보면 처음엔 좀 서먹서먹하지만 어르신들은 이내 마음의 문을 열고 호구조사를 시작하신다. 어디 사는지, 몇 살인지, 형제는 몇 인지 등등 먼저 질문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드신다.
학생들이 준비해 온 놀이와 활동, 노래와 율동은 어르신들의 색다른 기쁨이다.
종이에 색을 칠하기도 하고, 짧은 시를 함께 쓰기도 하고,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기도 하는 그 시간은 모두에게 특별한 배움의 장이 된다.
오늘은 사회탐구 동아리 학생들이 어르신들 도로 교통의 현실적인 문제를 조사하러 오는 날이다.
수업 중간쯤 학생들이 지도교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다.
학생들은 어르신들 사이에 앉아서 자기 소개하고, 설문지를 돌린 다음 한 문항씩 또박또박 여쭈어 본다.
어르신들은 몸짓, 손짓을 하며 느낀 대로 꾸밈 없이 대답하신다.
"건널목 신호등이 너무 빨리 바뀌어."
"맞아, 어느 땐 다 건너지도 않았는데 불이 확 바뀐다니까!"
"어휴, 그래서 밤에 다니면 큰일 나."
"노인네들 걸음걸이가 젊은 사람 같은 줄 아나 봐. 지네도 늙어보래."
버럭순님은 말씀 중에 화를 버럭 내신다.
"그리고 마을버스 서는 곳에 의자 좀 놔주라고 그래."
"지팡이 짚고 서 있으면 허리가 아파."
"지네도 늙어보래."
어르신들은 추임새처럼 '지네도 늙어보래'라고 하신다.
설문지 조사가 끝난 뒤 친화력이 생기자 분위기는 자못 유쾌하다.
사용법을 물어보시던 어르신의 휴대폰에서 난데없이 신나는 가요가 흘러나온다.
어르신이 어깨를 들썩이며 따라 부른다. 몇몇 어르신들도 흥겹게 노래를 하신다.
순간, 문해 교실이 노래 교실로 변한다.
"학생들도 같이 불러 봐. 아님 춤출래?"
학생들이 깔깔 웃으며 손사래 친다.
신나게 한 곡이 끝나자 다시 배우는 자세로 돌아간다.
"그것도 좀 알려줘. 키 ~뭔가 가게 앞에 있는 기계. 커피 한 잔을 마시려고 해도 복잡해서 원."
"그냥 돈 받음 쉽잖아. 그거 보면 뭐가 뭔지 정신이 없어."
키오스크 사용에 불편을 느끼시는 어르신들이 많다.
학생들은 다음 기회에 직접 가게로 모시고 가서 설명을 하겠다고 한다.
짧은 시간 속에서 무엇보다 따뜻한 것은, 세대가 서로 주고받는 미소와 정겨운 대화이다.
어르신들은 말 한마디라도 다정하게 해주는 학생들과 그사이 정이 담뿍 든다.
“이렇게 학생들랑 같이 있으니 참 좋네.”
하며 손을 꼭 잡으신다.
각자 떨어져 살고 있고, 바쁜 손주들을 자주 못 보시는 분들의 그리움이다.
학생들도 '우리 할머니 같아서 좋다'며 활짝 웃는다.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이 깊게 이어지고, 그 마음은 수업 뒤에도 즐거운 이야깃거리로 남는다.
서로 다른 세대가 만나 마음을 나누는 순간, 교실은 글자를 배우는 공간을 넘어 삶을 배우는 자리로 바뀐다.
학생들은 어르신들에게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다.
어르신들은 밝게 자란 학생들을 보며 지나온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훈훈함을 느낀다.
어르신들은 자식 키울 때 이야기, 손주 자랑 등을 하시고 학생들을 눈을 반짝이며 귀기울여 듣는다. 그리고 어르신들께 응석부리듯 자신들의 고민도 털어놓는다.
"우리 할머니랑 이야기한 것 같아요."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학생들이 어르신의 손을 다정하게 잡는다.
학생들이 끝 인사를 할 즈음이면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스친다.
"이거, 이거 가져 가."
어르신들은 가방을 뒤져 이런저런 사탕을 꺼내신다.
기침할 때 사탕을 오물거리면 멈춘다는 말이 돌아 어르신들의 배낭에는 여기저기 사탕이 들어 있다.
종류가 다른 사탕이지만 모두 모아서 학생들 손에 일일이 쥐어주신다.
"어쩜 이리 착할까. 우리 손자 손녀 생각나네."
"다음에 또 와."
"꼭 와."
돌아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교실은 한동안 여운에 젖는다.
짧았지만 깊었던 시간, 그 고마움이 어르신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준다.
오늘은 배움의 자리이자, 세대가 어깨를 맞댄 소중한 시간.
작은 만남이지만 그 안에 담긴 고마움과 기쁨은 오래도록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