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음을 입는 것
봄의 진달래처럼 화사하다.
분홍빛으로 주위를 물들인다.
환한 분홍색 옷과 모자를 쓰고 오신다.
누군가 '꽃이 걸어오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분홍 할머니, 고운정님이시다.
고운정님은 스스로 예쁘게 꾸미는 것이 곧 하루를 환하게 여는 일이라고 하신다.
"오늘 어디 가?"
"누구 만나는겨?"
유난히 분홍분홍한 날에 어르신들이 물으면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가긴 어딜 가, 요렇게 당신들 만나러 왔지."
그리고 이어서 분홍빛 입술로 말씀하신다.
"내가 밝아야, 주위 사람들도 밝아지는 거야.”
고운정님은 가능하다면 늙어도 가꿔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당신의 자존감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신다.
"선생님도 검정옷만 좋아하지 말고 환하게 입으셔."
무난하고 편안한 복장을 좋아하는 내게, 화려한 꽃무늬 옷도 입고 원색으로도 입으라고 하신다.
그래야 기분 전환도 되고 세상도 환해 보인단다.
"이것 봐, 이쁘지?"
샌들 신은 발을 내민다. 분홍색 페디큐어이다.
"어이구 돈도 많다, 우리 손녀 말이 그거 비싸다던데."
한 어르신이 혀를 내두르며 발톱을 유심히 본다.
"내가 발랐어. 잘 발랐지?"
"에구, 늙은이 주책이다."
친한 꽃잎화님이 살짝 눈을 흘긴다.
"어머, 고우셔라!"
나는 엄지 척을 한다.
몇몇 어르신들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신다.
그래도 고운정님은 끄떡없다.
"못하고 산 게 얼마나 많은데, 이제라도 이것저것 해 봐야 여한이 없지."
84세이신 고운정님은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일했으니 앞으로의 여생은 하고 싶은 것 하고, 먹고 싶은 것 먹으며 맘껏 숨 쉬고 살 거라고 하신다. 가족들도 그러시길 바란단다.
"왜, 그동안 숨도 못 쉬고 살았남?"
한 어르신이 묻는다.
"시어머니 독한 시집살이에 뼈 빠지게 일만 하고 살았어. 숨을 제대로 못 쉬었지."
과거를 회상하듯 고운정님은 미간을 찌푸린다.
"내가 이러면 얼마나 이러겠어. 내 몸 스스로 움직여질 때까지라도 이러고 살고 싶어."
주위 어르신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다.
"그래, 이래도 저래도 한 세상인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선심 쓰듯 어르신들이 부추긴다.
고운정님의 입가에 분홍빛 미소가 번진다.
고운정님은 모습처럼 마음도 곱다.
교실 안에서 크고 작은 오해가 생기면 조용히 듣고 있다가 다가선다.
“에이, 그런 뜻이 아닐 거야. 왜들 이러셔."
차분차분 마음을 풀어주신다.
누군가 속상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얼른 가서 “같이 차 마시러 가세” 하며 손을 잡는다.
고운정님은 여행을 좋아하신다. 성격이 화통하니 친구도 많다.
여행 이야기를 꺼낼 때면, 발그레한 소녀 같은 얼굴이 된다.
맛깔스러운 입담에 어르신들이 주위를 둘러싼다.
푸른 파도 일렁이는 바닷가에서 먹었던 회 이야기,
친구들과 돌담길을 걸으며 찍은 사진들,
벚꽃이 만발한 봄 풍경,
단풍 든 산길의 멋스러운 발걸음,
국내는 물론 해외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결코 자랑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느끼고 본 것을 재밌고 실감 나게 들려준다.
어르신들이 고운정님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남편이 떠나신 후,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도 인간적이며 정감이 담겨 있다.
어르신의 기억 속 풍경은 따뜻한 색감으로 채워져 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마치 그 자리에 함께 한 듯 마음이 따스해진다.
고운정님은 매일 좋은 글을 읽고 쓰신다.
필사하다가 잘못 적은 단어도 눈에 띄지만 살짝 손가락 끝으로 톡톡 치면 금방 알아채신다.
"그러게 선생님. 내가 여러 번 읽고 쓰는데도 다른 글자로 써질 때가 있어요. 어인지 아인지도 헷갈리고."
어르신들이 어려워하는 글자 중 하나인 '에'와 '애'의 쓰임을 말하신다.
꾸준히 쓰시라고, 정말 잘하셨다고 칭찬을 해드린다.
고운정님은 주위 어르신들에게 써 온 좋은 글을 읽어주는 것을 즐기신다.
들으시는 어르신들은, '맞아, 맞아'하며 계속 고개를 주억거린다.
고운정님은 중재 능력이 뛰어나다.
가끔 서로 다른 성격 탓에 작은 언쟁으로 부딪히는 어르신들이 있어도, 고운정님이 나서면 분위기가 금세 누그러진다.
“우리가 여기에 함께 있는 것은 다 좋은 인연이야. 서로 잘 이해하며 지내야지."
그 한마디면 불편하던 마음이 풀린다.
사람들은 고운정님을 '우리 반의 비타민'이라고 부른다.
웃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어두운 틈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약해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고운정님은 스스로의 환함으로 그런 것을 극복하시는 분이다. 날마다 옷장에서 꺼내는 분홍색 옷처럼 스스로의 삶을 고운 빛으로 물들이신다.
덕분에 문해교실은 언제나 분홍빛 웃음으로 채워진다.
서로 다른 빛깔 속에 분홍빛 고운정님의 밝음이 더해지면서 교실은 사계절 봄빛으로 물들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