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웃음 속, 기다리는 의자
아침결 햇빛이 따갑다.
콧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그러나 교실 문 앞에서 서면, 어르신들의 밝은 웃음소리나 구성진 노랫소리로 시원하게 땀이 식는다.
낯선 남자 어르신 한 분이 우리 교실 문밖에서 기웃기웃하신다.
"어느 어르신을 불러드릴까요?"
남자 어르신들이 문 앞에서 머뭇거리면 대부분 여자 어르신의 남편이시다.
"아니, 저어기 여기가 한글 배우는 곳인가요?"
더듬더듬 말문을 여신다.
"네, 여기 오신 거면 저랑 같이 들어가세요."
내가 웃으며 교실 문을 연다.
남자 어르신은 다시 주춤거린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갑자기 교실 안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다. 노랫소리도 뚝 끊긴다.
남자 어르신이 어색하게 발을 한 발 내딛는다.
"선생님, 새로 오신 분이세요?"
명랑희님이 반갑게 소리친다.
"네!"
나도 큰소리로 답한다.
"어서 오세요, 여기 자리 비었어요."
고운정님이 앞자리 빈 곳을 가리킨다.
남자 어르신은 조심조심 의자에 앉는다.
"어르신, 잠깐 앞으로 나오셔서 인사 나누세요."
내 말에 남자 어르신은 얼굴이 불그스름해진다.
어색하게 앞으로 나온 남자 어르신, 송골님은 몇 마디 인사를 하시곤 황급히 자리에 앉는다.
어르신들이 열렬히 큰 박수로 환영한다.
그러나 옆자리, 앞뒤 자리에 앉은 어르신들이 반갑게 맞아 주어도 정작 송골님의 표정은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마음 한구석에 ‘내가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걸까’라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드는 것 같다.
어르신들은 알뜰히 새로 온 분을 챙긴다. 교재의 배울 책장도 넘겨주고, 연필이 뭉뚝하면 새로 깎은 연필도 흔쾌히 빌려 주신다. 그리고 어디에서 오셨는지와 연세도 묻는다. 송골님은 수줍어하시면서도 꼬박꼬박 응해주신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송골님은 별 반응이 없다.
수업만 열심히 들으실 뿐, 어르신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어르신들은 쉬는 틈마다 이야기를 나눈다. 집안 사정과 자식 얘기, 친구들 이야기와 다녀온 곳 얘기, 아픈 곳 등, 때론 손뼉 치고 맞장구도 치며 소록소록 정을 쌓는다.
그 속에 홀로 앉아 계신 송골님의 존재는 돋보이기보다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남자는 나 혼자라서..."
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마음이 가볍지 않다는 뜻이다.
대부분 남자 어르신들은 그러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연거푸 수업에 나오지 않으신다.
전화를 하면, 거의 비슷한 말씀을 하신다.
"몸이 안 좋아서",
"집안일이 있어서",
"농사일이 바빠서"라는 말속에는 '적응이 안돼 외롭다'라는 속내가 숨어 있는 듯하다.
또 한편으론, 오랫동안 몸에 밴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다.
글자를 모른다고, 글씨가 틀린다고, 어르신들은 웃음으로 넘어가는 순간도 남자 어르신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오히려 부끄러움이 크게 다가와서,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다.
송골님도 세 달은 그런대로 잘 다니시더니 어느 날 갑자기 일이 있다며 안 나오셨다.
삽상한 바람이 부는 날이다.
"어머, 오셨어요!"
교실 문을 여는 순간, 내 눈이 동그래진다.
어르신들이 송골님의 자리를 뱅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며 흐뭇하게 웃고 계신다.
교실을 떠나신 지 한 달만이고, 처음으로 되돌아오신 분이다. 참 반갑다.
송골님은 1년 전, 아내를 먼저 보내고 우울증이 생겼는데 누님 같고 여동생 같은 어르신들 덕분에 마음이 밝아졌다고 하신다.
송골님은 돌아오신 뒤 어르신들과도 곧잘 이야기를 하고, 작은 먹을거리도 사 와 서로 나누어 드셨다.
다시 오신 뒤 한 달쯤 되었을 때, 송골님은 심란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시골집의 관리가 어려워 독거노인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셨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 버스를 3번 갈아타야 한단다.
"다시 와서 너무 좋았는데 어째요."
"다리 운동한다 생각하고 그냥 오세요."
어르신들이 몹시 섭섭해하며 한 마디씩 하신다.
"저도 어지간하면 다니려고 했는데, 도무지..."
마지막 수업날, 송골님은 음료수를 한 병씩 나누어 주신다.
"그래도 잘 생각해 보셔. 늘그막에는 정 들이는 게 쉽지 않아요."
"네 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어르신들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잘 생각해 보고 또 오셔, 기다릴게요."
"네, 네."
어르신들은 그 '네네'의 대답에 기댄다.
그리고 가끔씩 빈자리를 보며 말씀하신다.
"다시 오면 좋을 텐데, 거리가 너무 멀지. 그렇지?"
옆자리 어르신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르신들의 기다림과 아쉬움이 여운처럼 남는다.
어르신들의 정은 각별하다.
세월의 더께만큼 묵은정이 돈독하다.
그래서 누군가 앉았던 빈자리는 더 허전하다.
시간이 좀 흐르면, 그 아쉬움은 또 다른 바람으로 이어진다. 봄꽃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