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보다 값진 것
짜랑짜랑 울리는 매미소리에 발걸음도 경쾌하다.
하늘빛이 밝고, 흰구름도 곱다.
기분 좋게 교실 문 앞에 이르렀는데, 왁자지껄 고함소리에 멈칫한다.
보통 때의 노랫소리가 아니고, 화가 난 음성들이 마구 섞여 있다.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서니 두 어르신 사이에서 몇 분이 당황한 얼굴로 팔을 내젓는다.
"이러지 마요, 조용히들 좀 해요."
"이게 웬 난리야!"
"아휴, 남세스러워서 정말!"
웅성웅성한 분위기에 내가 깜짝 놀라며 묻는다.
"무 무슨 일이세요?"
울그락불그락 화가 잔뜩 난 꽃잎화님이 상대방 어르신을 삿대질한다.
"이 할망구가 나갈 거면 저나 나가지 여기저기 쑤셔대며 같이 가자고 꼬시잖아요. 의리도 낯짝도 없는 할망구!"
"뭐? 할망구! 이놈의 여편네가."
"뭐, 이놈의?"
"내 평소에도 저놈의 잘난 척하는 말투가 거슬렀어. 툭하면 아들이 미국 산다고 자랑질이나 하고."
"자랑질은 당신이 더 했어. 남 없던 서방인가, 우리 영감이 어쩌고 저쩌고."
"아이구, 지겨워. 가면 끝이야! 더러워서 내가 나간다."
"뭐어, 더러워? 이 여편네가 눈에 뵈는 게 없나."
더럽다는 말에 옆에서 말리시던 어르신의 눈꼬리가 따라 올라간다.
"이 양반, 나간다고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녜요. 점잖게 나가셔야지."
"내 말이. 나가려면 혼자 조용히 나가지 왜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꾀냐고?"
나는 검지를 입에 대고 좌우로 머리를 세게 젓는다.
"그만, 이제 그만하세요."
동갑내기인 두 분은 그리 친하지 않았고, 꼬박꼬박 예의를 지키며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지금은 몸싸움이라도 하실 기세여서 일단 두 어르신을 양쪽 끝과 끝 자리로 모셨다. 그리고 화를 가라앉히시라고 말한다.
"호호 두 번 숨을 들이마시고, 후~ 하고 길게 내쉬세요."
나는 호흡법을 따라 하라고 한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당황스럽다.
꽃잎화님의 자리는 가운데 분단 중간쯤, 다른 분은 출입문 앞자리에 앉았다.
동년배이긴 하지만 두 분의 앉는 자리가 떨어져 있어서 부딪힐 일은 거의 없었다.
한 반이라고는 해도 다 같이 한마음으로 어울리지는 못한다. 전체 모임이나 외부 모임에서는 똘똘 뭉쳐 단결이 잘 되는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더 친하고 덜 친한 분이 있기 마련이다.
예전에 다른 문해학교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어르신들 사이에 한 번 오해가 생기면 아이들 편싸움하듯이 한단다. 어느 땐 왕따가 되어 어쩔 수 없이 나가기도 한단다.
우리는 여태껏 그런 적이 없는데, 이번 사건의 발단은 돈이다.
문해교실은 한 달에 2만 원씩 수강료가 있다. 그런데 떠나실 분이 갈 곳은 지원을 받아 한푼도 내지 않는단다. 시설도 여기보다 더 낫고, 나들이도 자주 가며 공책이나 연필도 공짜로 준단다. 가끔 맛있는 간식도 주고 지하철역에서 내리면 바로 앞이 문해학교라서 편하단다. 그러니 그쪽으로 가자고 여러 어르신들께 권유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꽃잎화님은 정이 먼저지 정든 곳을 훌쩍 떠난다는 것이 못마땅하신 거다. 더구나 혼자 떠나면 되지 다른 분들에게 가자고 부추긴 것에 더 화가 나셨다.
나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괜찮습니다, 그쪽이 편하시면 언제든 가세요."
꽃잎화님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린다.
"아니, 붙잡든지 욕을 하든지 해야지 가라고 하면 어떡해요."
맨 뒷줄의 한 분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외친다.
"돈 많은 척하더니 2만 원이 아까워서 옮긴다고? 그동안 뻥쳤네."
그러나 갈 작정을 한 분은 이미 마음이 떠난 거다.
설혹 머문다 해도 마음이 떠나면 공부에 집중할 수 없고 불만과 갈등이 생긴다.
그분도 단번에 떠날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이냐, 돈이냐 얼마간 고심하며 선택하셨을 거다.
같이 떠나려고 결심한 다른 두 분이 눈치를 살피며 주섬주섬 책을 챙겨 일어난다.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가득하다. 아예 고개를 제대로 못 드신다.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돈이 궁해서..."
"딸이 집 가까운 곳으로 가라고 해서..."
"네 네, 이해합니다. 가셔서 몸 건강하게 열심히 공부하세요."
꽃잎화님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같은 반에 있어도 속마음은 아무도 모른다.
어제까지도 다정하게 '우리는 한 반, 한마음'했는데도 떠날 때가 되니 찬바람이 휭~ 분다.
어떤 분은 자음과 모음을 배우며 삶의 새로운 문을 열고, 어떤 분은 서툰 글씨로 오래 묵힌 속마음을 풀어놓는다. 또 어떤 분은 이렇게 갑자기 떠날 채비를 한다.
"선생님이 얼마나 잘해주고 잘 가르쳐 주셨는데, 나쁜 여편네! 아주 줄줄이 달고 나가네."
한 분은 보란 듯이, 두 분은 허리도 못 펴시고 종종걸음으로 교실 문을 나선다.
나머지 분들은 더 이상 동요 없이 자리에서 조용히 한숨을 쉰다. 나는 문가까지 배웅을 나간다.
그동안 들었던 정이 서운함으로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지만, 제자리로 돌아와 밝게 말한다.
"어르신들, 언제든 못 나오실 사정이 생기면 미리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꽃잎화님은 기분 좋지 않은 표정으로 미간을 잔뜩 찡그린다.
"88쪽이지요?"
나는 교재를 펼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가슴은 아릿하다. 따라나선 두 분 중 한 분, 딸이 옮기라고 했다는 분은 처음에 딸이 함께 와서 엄마를 부탁한다며 10분 남짓 눈물로 사정 이야기를 하고 갔다. 그런데 그 딸이 다시 무료로 하는 곳으로 옮기라고 한단다.
돈이 없다며 떠나신 분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고운정님이 슬며시 옆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이거!"
공책을 쭉 찢어서 급히 쓴 편지다.
받침도, 맞춤법도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삐뚤빼뚤 글씨.
서생닌 고마음니다 미안하오
아들이 하는 일이 잘 안 된다고 걱정하셨던 분이다. 시에서 하는 노인일자리를 구해야겠다고 하셨다.
충분히 사정을 이해한다. 사정이 있으면 어쩔 수 없다. 다만, 미리 언질을 주셨으면 이런 소동이 안 벌어졌을 것이다.
어르신들의 분위기가 아라 강물 속에 가라앉는다. 함께 했던 추억도...
'같이 배우며 정겹게 웃었는데...'
어르신들은 입을 굳게 다문다. 어느 분은 묵연히 창밖을 내다본다.
어르신들은 정이 참 많다. 그 정을 되새김질하며 다독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더운 여름도 막바지, 계절은 제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세 분이 떠나고 나서 며칠 동안 교실에 들어서면 빈자리처럼 마음도 휑하다.
떠난 사람도, 남은 사람도, 그 마음은 비슷하지 않을까.
떠난 분들 주위 어르신들이 아쉬운 듯 말한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더니 정말 그러네."
한 어르신이 호탕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바꾼다.
“공짜 좋아하면 머리 벗겨져. 그나마 숱도 없는데 하하하!"
"우리 더 열심히, 공부합시다!"
그리고 예전 분위기로 차츰차츰 돌아온다.
꽃잎화님은 시종 우울한 표정이시다.
평소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차분하고 교양 있게 했는데, 그 말싸움으로 안 보여줘도 될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신 듯하다. 거기다가 마음을 짓누르는 힘든 일이 있다. 꽃잎화님은 사별 후 다리가 상할 만큼 어렵게 돈을 모아 자식들을 가르치셨다. 꼼꼼히 모은 돈으로 세상 떠날 때까지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겠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그런데 얼마 전 미국에 있는 며느리가 암수술한 것이 재발해서 당신이 가진 돈을 몽땅 다 보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아는 어르신들이 '그래도 쓸 건 좀 놔두고 보내지' 하면서 염려했다.
"며느리도 내 자식이에요. 친정 엄마도 없는데 내가 딸처럼 챙겨야지요. 타국에서 오래 아파 어려워진 사정을 아는데 어떻게 부모가 있는 돈을 아끼겠어요. 나 죽을 때 장례비 정도는 여기 있는 아들이 해 줄 수 있어요."
어르신들은 꽃잎화님의 마음을 이해한다.
사람의 인연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세 분이 떠나고 나서 남은 어르신들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공짜보다 더 값진 것들은
우리 곁에,
서툰 글씨 속에,
익숙한 교실 안에,
하나로 겹친 사랑의 마음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