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열정으로
아침 햇살이 방으로 스며들기도 전이다.
구슬옥님은 밤새 챙겨놓은 가방을 다시 점검한다.
옛 가요가 담긴 작은 녹음기도 소중히 주머니에 넣는다.
어젯밤에 흥얼거렸던 노래가 다시 리듬을 타며 지팡이와 함께 발을 옮긴다.
"엄마, 그러시다가 몸 상해요. 조금씩 천천히 하세요. 지금서 대학 가실 것도 아니고."
딸들이 걱정을 해도 들은 척하지 않는다.
눈이 어둡고 다리가 아파서 잘 걷질 못해도 구슬옥님의 공부 욕심은 아무도 따르지 못한다.
밤잠도 참으시고, 새벽녘에 깨도 공책부터 찾는다. 공부가 제일 재미있단다.
구슬옥님은 흥이 좋으셔서 노래가 흐르면 몸도 같이 따라간다.
아침에 교실문을 열면 구슬옥님의 작은 녹음기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때론 혼자, 어느 땐 여럿이서 노래로 교실을 채운다.
흥겨운 시작이다.
"오늘 배운 것 한 번만 써오세요."
일손이 바쁜 철이나 날씨가 궂으면 세 번 쓰기를 한 번으로 줄여 숙제를 낸다.
날씨, 계절과 상관없이 구슬옥님은 최소 5번을 쓰신다.
얼마나 알뜰하신지 지나간 큰 달력을 여덟 조각내서 연습장 공책을 만드신다.
열심히 하시는 만큼 실력도 제일 좋다. 글쓰기 대회에서 몇 번 상도 받았다.
새로운 분이 들어오면, 공책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친절히 요령도 알려주신다.
짝꿍 버럭순님이 채 못 쓰신 문장을 챙겨 써 주고, 이해 못 하는 부분도 설명해 주신다.
겨울에는 천식 때문에 며칠 쉬실 때도 있고, 허리와 다리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시는 날에는 못 나오신다.
그러면 이튿날, 나를 보자마자 급하게 묻는다.
"지난번에 어디까지 배웠어요?"
인쇄물을 드리면 얼른 훑어보신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최고이다.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도 아까워서 빨랑빨랑 수업하자고 하신다.
"글자를 노래 부르듯 하면 잘 외워져."
"담다 담다 바구니에 담다."
"닮다 닮다 엄마와 닮다."
"낮은 밤과 반대 낮잠."
"낯은 얼굴 낯익다"
"낫은 풀베기"
"낟은 낟알"
"선생님이 우리를 가르친다
선생님이 저곳을 가리킨다"
배운 것에 당신 나름의 리듬을 넣어 외우신다.
구슬옥님은 자존심이 강해서 절대로 남의 신세를 안 진다. 한 번 베풂을 받았으면 꼭 갚는다.
"에이, 그러지 마셔. 그냥 드셔."
어느 어르신이 건넨 요크르트 한 병도 사탕으로든 뭐로든 대신한다.
언제나 당당하고 명랑하며 정갈하시다.
어느 분이 말하시기를, 아들만 있는 집의 어머니 옷차림과 딸 있는 집의 어머니 옷차림은 차이가 난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딸이 넷인 구슬옥님은 옷 색깔이나 차림새에 신경을 쓴 티가 난다.
겉으로 보기엔 좀 차가운 듯해도 정이 많아서 골고루 챙기신다. 누군가 결석을 하면 제일 먼저 전화를 걸어 이유를 묻고 가족처럼 걱정하신다.
내가 둘째 딸을 떠나보낸 일을 아시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나도 10여 년 전에 40대 초반의 딸을 잃었어요. 제일 착하고 예쁜 딸이었지요. 중학교 교사였는데 가버리고 나니 다섯 딸 몫이 다 다르더라고요. 하루도 안 운 적이 없어요. 십 년쯤 되니 조금씩 옅어지는 거예요. 선생님, 아직 멀었어요. 그 그리움은 자식 잃은 부모나 알아요."
동병상련이랄까, 다정히 안아주시며 당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그리고 건강 잘 챙기라는 말을 매 수업시간 끝날 때마다 하신다.
"자꾸 살찌면 건강에 안 좋아요. 선생님, 몸조심하세요."
딸이 떠난 뒤, 잦은 폭식으로 내 몸은 자꾸 불어났다.
"이제 고무줄 바지를 입어야 해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여러 어르신들이 서슴없이 윗옷을 올리시더니 서로 바지춤을 보여준다.
"선생, 나도 고무줄 바지야."
"이것 봐요, 나도 고무줄!"
어느 분은 팬티까지 보인다. 그 바람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어난다.
어르신들의 위로법은 이렇게 다르다. 몸소 함께 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되도록 슬픈 이야기, 힘든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서로의 슬픔이 배가되어 수업 시간 내내 이어지기 때문이다.
즐거운 이야기만으로도 모자랄 시간에,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곤 우울한 이야기는 삼간다.
그러나 월요일, '내 생활 이야기하고 쓰기' 시간에는 솔직한 일주일 동안의 일들에 귀 기울이고 공감한다.
여하튼, 여러 어르신이 허리춤을 내 보여도 구슬옥님은 절대로 허리춤을 보여주지 않는다.
"선생님, 살 빼야 건강해요."
하시며 측은하게 내 배를 바라보신다.
85세인 당신은 고무줄 바지를 안 입으신단다. 민망하기도, 고맙기도 하다.
딸처럼 생각하시는 마음이 정겹게 느껴진다.
오늘도 구슬옥님은 교실 문을 활짝 연다.
다리엔 늘 통증이 따라붙고, 이따금 천식이 숨결을 조인다.
하지만 그 무엇도 배움 앞에선 핑계가 되지 않는다.
“나는 더 배우고 싶어요. 더 알고 싶어요.”
그 목소리는 단단하고, 눈빛은 소녀처럼 반짝인다.
교재를 넘기는 손끝은 투박해도 조심스럽고 정성스럽다.
글자 하나하나를 마음에 익히고, 문장 하나하나를 되새긴다.
구슬옥님은 글을 잘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노래도 참 잘 부르신다.
교실 한쪽에서 흘러나오는 구슬옥님의 노랫소리는 모두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함박웃음을 피워낸다.
그 목소리는 평생을 지내온 삶의 울림이기도 하다.
지팡이를 짚고 숨이 차도, 구슬옥님은 일찍 교실에 도착한다.
“아프다고 주저앉을 순 없잖아요. 오늘도 더없이 소중한 하루니까요.”
그 말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배움이란 결국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걸 구슬옥님은 직접 보여주신다.
아픔 위에 피어난 열정, 그리움 위에 올려진 글자들...
노래처럼 흐르는 하루하루를 구슬옥님의 목소리로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