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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생, 얼릉 얼릉!

우리 버럭순님이 변했어요

by 제노도아

윤달 늦장마가 폭우로 쏟아진다.

건물 입구에서 거친 빗줄기를 우산 끝으로 밀어내며 뱅그르 돌린다.

빗물을 턴 우산을 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여기저기 어르신들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나도 웃으며 따라 흔든다.

빗속인데도 모두 꽃단장이시다.


"왜 이제 와!"

갑자기 호통치는 소리가 교실 안에 쨍쨍 울린다.

'수업 시간이 아직 20분이나 남았는데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삼킨다.

"왜, 왜요? 어르신!"

바짝 다가서서 얼굴을 마주한다.

눈가에 노여움이 괴어 있다. 나를 많이 기다리신 듯하다.

버럭순님은 올해 89세이시다.

귀는 좀 어둡지만 안경을 안 쓰고도 칠판 글씨를 다 보신다. 그리고 느릿느릿 글을 읽는다.

버럭순님이 책상을 탁탁 친다. 이거 보라는 듯이.

"이게 뭐예요?"

내가 궁금증을 가득 담아 다정하게 물어본다.

그제야 얼굴이 스르르 풀리신다.

금세 함박웃음을 띠며 검정봉지를 무심하게 툭 들었다 놓는다.

젊은이들의 유행어, '오다 주웠어'하는 것처럼.

버럭순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하신다.

"이거 우리 집 마당에서 딴 보리수 열매야. 아침 댓바람에 비 맞으면서 땄어. 동네 여편네들이 다 따가기 전에 얼릉 따 왔어."

버럭순님은 신이 나서 말을 잇는다.

"선생, 얼릉 얼릉!"

급히 따셨는지 비에 젖어서인지 4분의 1은 으깨진 보리수 열매 검정봉지를 내쪽으로 자꾸 민다.

비에 젖은 빨간빛이 곱다.


버럭순님은 처음에 표정이 거의 없었다.

귀가 잘 안 들리니 말소리가 높고 컸다.

처음 본 어르신들은 버럭순님을 몹시 꺼려했다.

웃음기 없는 얼굴, 퉁명스러운 말투와 윽박지르듯한 표현이 어르신들 사이를 겉돌았다. 안면이 좀 있다는 짝꿍 85세 구슬옥님도 간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 날, 기억하고 싶은 일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주제로 수업을 했을 때 버럭순님은 몹시 흥분한 어조로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인간, 노름만 좋아하더니 죽는 순간까지도 밉상이더라고. 나쁜 인간! 난 지지리 고생하고 살았는데 저는 뭐 여한 없이 잘 놀았다구? 그러곤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갔어."

평소에도 버럭순님은 남편 이야기만 나오면 버럭 더 화를 냈다.

미안하단 말, 고맙다는 말, 마지막으로라도 한마디면 됐을 텐데 싶었다.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 한마디가 남은 이들의 기억과 추억을 아프게도, 그립게도 할 수 있는 걸 짙게 느꼈다.

"그런데도 정은 좋았나 봐. 아들을 네 명이나 쑥쑥 낳으시고."

뒷줄 고운정님의 말에 모두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정은 무슨 얼어 죽을 정!"

버럭순님이 버럭 화를 내며 흘기죽죽한 눈으로 뒤를 쏘아보았다.

고운정님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데 버럭순님은 아들 넷 중 남편 외모를 쏙 빼닮은 둘째가 제일 좋다고 하신다.

둘째 아들이 걸핏하면 화를 내는 버럭순님을 차로 모시고 니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버럭순님은 문해교실에서 40여 분 거리의 시골에 사신다.

가끔 마당에서 키운 주먹만한 토마토 두어 개, 직접 따서 만든 오이짠지, 당신이 아껴두었던 사탕 등을 검정봉지에 꽁꽁 싸서 혼자만 먹으라며 건네주셨다.

"선생, 이거 얼릉 얼릉."

단 한 번도 선생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선생이다.

하루는 주신 사탕을 다른 어르신들과 골고루 나누었더니 마구 화를 내셨다.

사탕 받은 어르신들이 쩔 줄 몰라했다.

나는 얼른 버럭순님의 손을 높이 들고 흔들며 말했다.

"우리 모두 감사 박수!"

어르신들이 마지못해 손뼉을 쳤다.

버럭순님은 멋쩍어하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뒤로는 나누어 먹을 것이 있으면 선생 맘대로 하라며 선뜻 내으신다.

어쩌다 한 번씩 선생, 얼릉 얼릉!하시지만, 우리 교실은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어느 수요일 아침, 갑자기 버럭순님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요, 새벽에 부엌 뒷문을 열고 나가시다가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나서..."

버럭순님은 놀라 넘어지면서 다리를 다쳐 입원을 하셨단다.

한 달 동안 거동을 못하게 되자 반 어르신들의 걱정이 돌탑 쌓듯 했다.

"어째, 아예 못 나오시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괜찮아지셔."

"겨울에도 내복 한 번 안 입고 건강하셨는데 곧 회복되실 거야."

"에궁, 큰언니 목소리가 그립네."

늘 보던 얼굴이 안 보이면 보고 싶은 건 당연하다.

버럭순님은 내가 전화로 병문안을 간다고 하자 대뜸 버럭 화를 냈다.

"오긴 뭘 와, 나갈 때 되면 어련히 나갈 건데. 선생, 절대 오지 마!"

한 달쯤 지난 뒤, 버럭순님은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셨다.

문해교실에 나오니까 좋다고 하셨다.

못 본 사이, 웃는 연습을 하셨는지 곧잘 웃었다.

"얼굴이 환해지셨어요."

"선생이 그랬잖아. 내 웃는 얼굴이 이쁘다고."

지나쳐버린 말을 나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버럭순님은 기억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내가 자주 웃으니까 사람들이 좋아했어."


버럭순님이 변했다.

이제 종종 웃고 사람들과 대화도 즐기신다.

오랜만에 연필을 잡으니 손 떨림이 더해진 것 같다시면서도 열심히 쓴다.

가끔,

"에이 씨~ 왜 점점 안 써져."

하며 화를 내시지만 전처럼 듣기 거북한 말은 안 하신다.

뭐든지 처음 하는 것은, 무조건 '안 해'하시던 것도 많이 줄었다.


"오늘 노래교실 같이 가요."

구슬옥님이 버럭순님의 팔을 잡아 끈다.

"안 해. 나 노래 못해."

"가서 노래 들으면 흥겨워져요. 어서 일어나세요."

그러면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다.

아침에 교실 도착 1번,

연세도 1번,

마음 씀씀이도 1번이 된, 버럭순님은 우리 교실의 왕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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