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만난 그 순간
3월, 이른 봄이다.
꽃이 필 무렵 꽃샘추위의 시작이다.
교실문을 여니
우아, 온갖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색색의 옷, 입술색도 다르다.
한껏 꾸미고 외출하신 어르신들.
참 곱다.
두 번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첫울음으로 엄마 품에 안길 때, 그리고 새 인생을 펼칠 때이다.
어르신들은 새내기 한글반 학생들이다.
한글로 새로운 삶을 그리려고 달려오신 분들이다.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큰소리로 외치며 머리 위로 큰 하트 모양을 만든다.
교사인 나의 원래 성격은 이렇지 않다.
어느 모임이든 뒷전에서 소리 없이 웃는 것이 맘이 편하다.
그런데 문해 수업은 나를 바꾼다.
귀가 어두우시니 크게 말해야 하고, 눈이 침침하시니 칠판 글씨나 동작이 커야 한다.
다른 곳에 가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도, 이 교실에서는 말과 동작이 좀 과장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즐겁다.
수업 첫날,
어르신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쓰시는 날이다.
"어떻게 잡는 거지?"
나를 바라보며 연필을 집었다 놓았다 하신다.
설명을 듣고 겨우 쥔 연필이 공책 위에서 흔들린다. 손이 떨린다.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공책 제일 위칸에 큼직하게 쓴다.
그것을 보고 그린다.
선을 그리고 곡선도 그린다.
다음 시간에 배울 자음과 모음을 미리 연습 중이다.
자음은 묵묵히 살아온 인생의 첫소리가 되고, 모음은 묵었던 마음속 작은 외침이 된다.
칠팔십 년, 말은 잘하고 많이 했지만 글은 전혀 쓰임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어르신들은 내 손으로 나를 쓰기 시작한다.
비로소 내 삶의 첫 글자를 적고 있는 것이다.
몇몇 어르신은 눈가가 촉촉이 젖는다.
"내가 글씨를 쓴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어르신의 나뭇등걸 같은 손을 꼭 잡아준다.
전에, 사람들이 가끔 묻곤 했단다.
“할머니,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게 뭐예요?”
그럴 땐 못 들은 척, 화제를 돌리곤 했다.
입 안 가득 무겁게 삼킨 세월은, 혀끝에 쓴맛을 남겼다.
그 질문은 아픔처럼 가슴을 파고들었고, 이 자리에 오게 만들었다.
어릴 땐 어머니 일을 돕거나 남의 집 잡일을 거들었고, 자라서는 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내 이름 석 자’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글자는 세월과 상관없이 어르신들의 곁을 무심히 지나쳤고,
나이가 들어 일손을 놓게 되자 제일 먼저 달려온 것이 여기란다.
몸은 이곳저곳 많이 상했지만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오고 싶었던 곳.
한처럼 맺힌 배움의 열망.
"내가 산 것이 수십 권의 소설이야."
"나도, 나도!"
어르신들은 입을 모은다.
"그냥 그대로 편히 살면 되지, 왜 뒤늦게 글을 배우려고 하세요?"
그 질문에 대한 각기 다른 이야기, 다양한 삶의 모습을 지금부터 펼치고자 한다.
이제, 남이 써준 이름이 아니라 내가 쓰며 나로 살아가는 이야기.
내 마음과 인생을 당당히 한 줄씩 써 내려가고 있는 어르신들.
나의 할머니이고, 어머니이며, 언니인...
문해교실 어르신들의 희망과 사랑, 그리움을 함께 만나려 한다.
♡말씀드립니다♡
이 글은 어르신들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일부 재구성합니다.
등장하는 어르신들의 성함은 각자의 특징과 성격을 반영하여 가명으로 바꾸어 사용하며,
~님으로 통일합니다.
또 글의 흐름상 존대어는 부분 부분 생략하고, 주로 평어체로 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