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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조용하지만 강하게

고요 속에 깃든 울림

by 제노도아

아직 늦더위가 한낮의 땀방울로 매달린다.

햇살은 여름을 품고 있지만 아침결 바람에 가을이 느껴진다.

"좀 늦었어요."

수업 직전에 바삐 들어오시는 금향님의 얼굴이 밝지 않다.

"뭔 일 있어?"

내가 묻기도 전에 어르신들이 먼저 알아채신다.

"뭐, 별일은 아니고..."

금향님은 말끝을 흐리신다.

금향님의 일상은 늘 남편 곁에서 이어진다.

루게릭병 초기인 남편을 돌보시는 일이 지금은 삶의 1순위이다.

남편은 힘이 약해져 자주 물건을 떨어뜨리고, 발음도 어눌해지셨다고 한다.

전보다 기력이 많이 쇠하셨지만 집에서 모시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다고 하신다.

어르신들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다 왔으니 수업 시작해요, 선생님!"

평소처럼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게 모른 척해주는 것이 금향님을 편하게 한다는 걸 알고 있는 따뜻한 배려이다.

도와줄 수 있는 것은 힘을 합하되, 도움이 되지 못할 일은 조용한 격려가 낫다는 걸 아신다.

금향님은 아무 말없이 공책을 펴고, 연필을 꼭 쥐고, 글자를 하나하나 새기듯 적어 내려간다.


금향님은 늘 조용조용하시다. 말투도 행동도 다 그러시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있다.

금향님이 한 번 목소리를 내시면, 놀라운 힘으로 바뀐다.

작은 몸짓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는 차분하고 힘차다.

금향님은 어르신들이 무언가를 결정 못해서 우왕좌왕하실 때 가만히 있다가 한마디 하신다.

"경우가 그렇지 않지요."

금향님의 목소리는 작지만 힘이 있다.

어수선하고 요란한 세상 속에서 진정한 울림은 조용한 곳에서 피어나는 것임을 금향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가볍지 않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설득력이 있다.

가끔 남편을 모시고 병원에 가느라 교실에 나오지 못하실 때도 있다.

"선생님, 오늘 공부 못 가요."

아침 일찍 전화를 하시면 그날이 남편과 병원에 가시는 날인 줄 안다.

그런 날이면 금향님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진다.

고요하지만 힘이 있는 그 자리는 비어 있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누군가의 존재는 그저 거기 있음으로도 빛이 된다는 것을...


금향님의 자녀들은 부모님을 모시고 자주 여행한다.

아버지의 병환이 더 깊어지기 전에 여행 계획을 많이 잡는 듯하다.

"다음주 못 나와요. 애들이 같이 가자는 데가 있어서..."

자랑도 없고 물으면 그때 사실대로 대답하신다.

얼마 전 강원도에 가족 여행을 갔다가 하룻밤도 묵지 않고 오셨다고 한다.

"왜?"

"왜, 그냥 왔어?"

어르신들의 물음에 궁금증이 가득하다.

"물이 없어서 난리인 걸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 어떻게 놀다 와요."

'왜?'라고 묻는 어르신들을 돌아보며 대답하신다.

"물차로 물을 날라 사용하는데, 놀러 간 사람이 어찌나 민망하던지."

말로만 듣다가 가 보니, 미안해서 머물지를 못하겠더란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도로 가자고 보채서 쉬지 못하고 되돌아오셨단다.

"아이구, 그렇다고 그 먼 길을 가놓고선 그대로 와? 자식들이 어렵게 시간 내서 모였을 텐데. 물은 그렇다 해도 그 사람들도 벌어먹고 살아야지."

한 어르신이 나무라듯 말씀하신다.

금향님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신다.

"물 부족해서 안쓰러운데 우리만 좋다고 바닷가에서 웃고 떠들며 놀면 어째요. 딴 나라 사람들도 아니고."

어떤 어르신이 맞장구치신다.

"그려, 그려 잘했어. 놀러 가는 건 다른 때 해도 되잔혀. 내 동포가 어렵다는데 같은 마음이어야지."

금향님은 수줍은 모습과는 달리 주관이 뚜렷하시다.

아닌 것은 아니고, 맞는 것은 맞다고 하시는데 억지가 없다.

금향님은 말이 많지 않아도 눈빛에 사랑을 받고 베푸는 삶의 빛을 담고 있다.


문해교실에서 글을 배운다는 건, 단순히 글자를 익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도록 묻어둔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일이다.

어르신들은 다듬은 연필로 삶을 기록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공책에 남긴다.

글씨는 좀 들쭉날쭉하지만 그 속에는 시간이 빚어낸 단단함과 따뜻함이 어려 있다.

금향님이 들려주시는 힘 있는 한마디가 다른 어르신들의 기억에 남고, 당신의 삶을 끝까지 꿋꿋하게 지켜주리라는 것을 안다.

남편의 병이 점점 악화되어도 끝까지 뒷수발을 드시고, 헤어짐도 담담히 견디실 분이다.

우리 교실에는 남편을 먼저 보내신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분은,

"술만 마시면 때리고 부수고 욕설을 퍼부어서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요. 이제 사람답게 살아서 좋아요."

하시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또 어느 분은,

"딸만 다섯 낳으니 시어머니 구박이 참 심했어요. 그런데도 씨앗 안 보고 다섯 딸을 얼마나 예뻐했는지 정말 고맙지요. 가신 지 이 십 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그리워요."

하시고 눈시울을 붉히신다.

"있으나마나한 사람이었어요. 애들도 다 내가 등골 빠지게 일해서 키웠고. 그래도 하늘 가는 날은 미안하다고 하데요.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지요."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둘이 죽어라 일만 했어요. 조금씩 땅을 사고 내 집을 짓고 하는 동안 정신없이 살았어요. 좀 편해졌다 싶었더니 덜컥 병이 나서 떠나셨지요. 편히 한 번 살아보나 했더니..."


어르신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그 사연들을 들을 때마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남은 삶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깊어진다.

어르신들의 열심히 살아오신 흔적이 굵게 패인 주름살로, 거친 손마디로 고스란히 보인다.

우리 어르신들은 과하게 자기 자랑도 자식 자랑도 하지 않으신다.

어쩌다 그날 수업 주제와 연관된 이야기 속에 개인사가 섞이면 꾸밈없이 솔직하게 풀어놓으신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나를 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신다.

나는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 건강이니 잘 챙기시라고 매시간 강조한다.

건강하실 때, 자주 움직이시고 여행 갈 일이 있으면 결석해도 되니까 잘 다녀오시라고 한다.


고요한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 숨어 있는 힘이야말로 세월의 파도에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이다.

금향님은 잔잔한 웃음과 눈빛,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조용히, 묵묵히, 그러나 할 말은 제대로 하면서 흔들림 없이 내 길을 가라고...

자리에 앉아 열심히 글을 쓰고 계신 금향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작은 등이지만, 그 안에 커다란 세상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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