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걱수걱 자란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이 동네는,
아침마다 까치소리가 유난히 자주 들린다.
반가운 손님이라도 오는 걸까.
그 소리에 마음이 먼저 웃는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다.
산책길 돌아 나오며 작은 다리를 건넌다.
그 다리 앞, 할머니 세 분이 오손도손 직접 기른 채소를 팔고 있다.
가지, 호박, 고구마순, 깻잎, 상추, 고추, 고구마, 감자, 오이, 파...
흙내음 묻어나는 정성들이 햇살에 반짝인다.
그중 한 분,
그분의 웃는 모습은 돌아가신 내 할머니와 겹쳐진다.
가지와 오이를 사며 그 할머니와 마주 보며 웃는다.
"사 줘서 고마워."
나는 아니라며 할머니의 거친 손을 가만히 잡아 본다.
그리고 속으로 '서산댁 할미'라고 정겹게 불러 본다.
할머니가 스스로 당신을 부르시던 말이다.
그 호칭 안에 할머니의 세월이 전부 녹아 있던 것 같다.
생각이 밀려온다.
눈치 없고 눈비음하던 손주들보다, 숫저운 맏손녀인 내게 담뿍 정을 주셨던 할머니.
젖먹이 때 내가 투레질을 하면 손뼉 치며 웃으셨다는 할머니.
그때부터 대소변을 그느지 못할 때,
방학 때 할머니댁에 머물고 있을 때도,
할머니는 늘 보드레한 명주 수건으로 내 목을 감싸주셨다.
"목이 따스해야 고뿔 안 걸리고 건강혀."
그 말씀이 깊이 남아서일까.
나는 지금도 여름만 지나면 목을 따뜻하게 감싸는 옷을 입는다.
엄마가 그게 더 목을 약하게 만든다고 걱정했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사랑'이라는 진심으로 나를 대했으니까.
할머니는 할미꽃을 보면 '내 꽃이다' 하셨고,
하늘로 가시기 전엔 '나는 할미새가 될 거여'라고 하셨다.
삭정이 같은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
'울애기'하며 마지막까지 웃음을 남기셨던 할머니.
그랬던 할머니를 나는 오늘 뵌 듯하다.
내 손에 들린 가지와 오이, 그 할머니의 정성이 내 할머니의 온기가 된다.
사랑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문득 돌아본 그 자리에서 나는 할머니를 만났다.
사랑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