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너의 목소리
꽃잎이 나부끼던 날이었어.
나뭇가지마다 연초록이 돋아나는 계절,
창문을 열면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살그미 이마를 짚었어.
병실 안에는 잔잔한 기계음이 흐르고, 너는 고운 꿈꾸듯 눈을 감고 사흘이나 말이 없었지.
병원에 들어온 지 일주일째, 며칠은 2시간 간격의 진통제로 버티더니 그 뒤 내내 잠을 잤어.
속눈썹 위로 물기가 젖기도 하고, 가녀린 숨결이 인공호흡기에 부옇게 서렸어.
그때 창밖에서 들려온 해맑은 웃음소리가 내 마음을 소록소록 흔들었지.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 너의 목소리였어.
*자존심과 자신감, 여자의 머리
네 긴 머리카락은 살포시 깃든 햇살을 받으면 부드럽게 빛났어.
바람이 불면 살랑살랑 흔들렸지.
거울 앞에서 머리 모양을 바꾸며 콧노래 부르고, 혼자서 머리를 땋곤 했어.
첫 번째 수술 후 너는 비니 속에 민머리를 꽁꽁 감추었어.
자연스레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이 사라져 버렸지.
너는 습관처럼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려다가 주춤했어.
거울 속의 모습이 낯설고 위축되어선지 거울을 멀리했어. 자신의 일부와 정체성을 잃은 듯했지.
선택의 여지없이 강제로 사라진, 검은 머리 대신 자리 잡은 어설픈 가발...
언젠가 너는,
"머리를 잘 길러서 기부 한 번 할까 봐."
하며 정성스레 빗질을 했어.
시간이 흘러 쇼트커트 모양이 된 뒤에야 큰딸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머리 이야기를 꺼냈어.
"예쁘게 잘 어울리는데."
진심 어린 말이었지만 넌 쓸쓸하게 미소 지었어.
"난 긴 머리가 좋아."
힘없는 목소리로 한 마디 했지.
너의 목소리에는 무력감과 슬픔, 불안이 스며있었어.
두 번의 수술 뒤, 너는 항암치료는하지만 이번엔 머리카락이 안 빠져서 좋다며 작게 웃었어.
여자들에게 머리카락과 머리 모양은 단순하지 않아. 신체의 일부 이상 많은 것을 담고 있지.
대부분의 여자들은 머리 모양을 바꿀 때 중대한 결정을 할 때처럼 신중해.
머리 모양은 그 사람의 정체성, 아름다움, 자존감, 감정의 표현과 변화, 나아가 사회적인 이미지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지.
그 사람의 개성과 매력을 드러내므로 큰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야.
처음 항암 치료를 받으며, 너는 나지막이 말했어.
감추려 했지만 난 알았지. 실컷 울고 난 뒤의 목소리였어. 마음이 너무 저리고 아팠어.
"엄마! 자고 나면 머리가 한 움큼씩, 뭉텅뭉텅 빠져 있어. 이젠 싹 밀어야겠어."
그 충격과 상실감, 자존심의 저하, 강요된 변화에 대한 분노를 삭이며 너는 새로운 적응 과정을 겪고 다져야 했어. 괜찮은 척, 밝고 맑게 웃으며...
그런데 삐죽삐죽 자라던 그 머리를 조금씩 조금씩 모양 잡아 다듬으며 단발머리가 되었을 즈음, 갑자기 넌 응급실로 실려 갔어.
*단발머리 발랄한 중학생
창가의 햇살, 아이들의 웃음이 반짝반짝 빛나.
"너 앞머리 혼자 잘랐니?"
"너무 깡똥해, 하하하!"
미용실에 다녀온 뒤, 학교에 가면 여학생들의 주제는 머리 모양이야.
가뜩이나 맘에 들지 않아 찡찡거리다가 등교했는데, 친구들의 놀림이 더 마음을 상하게 해.
수업 시간에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꾸중을 듣지.
머리 모양이 부각될 때마다 아이는 더 좌절해.
그러나 그것은 잠시야. 솔금솔금 시간이 지나가면 실수담처럼 가벼워져.
아이들의 웃음 포인트는 정해져 있지 않아. 사방이 관심사고, 두루두루지.
"새로 오신 국어 선생님 말투가 왜 저러냐."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럴싸한 성대모사를 해.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
"수학 시간에 졸다가 팍!"
책상에 부딪힌 이야기에 또 까르르해.
"이번 시험 진짜 망했어. 엄마한테 죽었다, 휴우."
"선생님이 거짓말쟁이야, 이번 시험은 쉽다더니."
서로 위로하고 공감하며 까르르까르르.
"나, 그 오빠에게 완전 빠졌잖아."
선배 이야기나 연예인 이야기도 한몫을 하지.
그 시간만큼은 시험도 공부도 아무 걱정이 없어. 아이들에게 가장 빛나는 순간이지.
그 시절, 그 나이에는 웃을 일이 가득가득해.
맛깔스레 이야기를 잘하는 너의 주위에는 늘 친구들이 모여 있었어.
*햇살 같은 너의 목소리
"엄마, 엄마!"
집안 구석의 먼지까지 나풀나풀하도록 너는 급하게 뛰어 들어오곤 했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 주위를 맴돌며 어쩌고 저쩌고, 고주알미주알, 하루의 일을 전했지.
"응, 그래. 알았어, 알았어."
일손을 놓지 못하고 나는 주방으로, 방으로 종종걸음 했어.
집안일하랴, 글 쓰랴, 컴퓨터는 하루 종일 켜놓은 채였어.
"울 엄만 맨날 바빠."
너는 오리처럼 입을 쑥 내밀고 뾰로통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 밝아졌어.
"그래도 난 엄마가 작가여서 좋아. 엄마 책들도 친구에게 자랑하고."
너는 생글거리며 나를 자랑스러워했지만, 나는 그 귀하디 귀한 시간을 자주 너와 함께 하지 못했어.
글이 뭐라고, 뭐가 우선이라고,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한 너와의 시간을 스치듯이 보냈지.
그랬던 네가 점점 말없이 가라앉던 날들을, 이제는 조용히 불러내야 할 시간이야.
저문 햇살처럼 희미해진 목소리를 따라가며, 그날의 너를 다시 마주하려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