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가족이 될 수 없었던 남자

그는 정말 사랑했을까?

by 제노도아

잿빛 그림자는 늘 가까이에 있다.

진실은 시간이 지나서야 보인다.

본심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따뜻한 날의 씁쓸한 만남


가로수의 연둣빛 잎사귀가 나비처럼 나풀나풀거렸어.

햇살이 포근포근 어깨를 다독이는 오후.

모처럼 정성껏 화장을 하고 산뜻하게 집을 나섰어.

만나러 가는 동안, 부푼 기대감에 설레며 발걸음도 가벼웠지.

나는 심스레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어. 화사한 모습의 네가 있었어.

그리고 네 옆엔 지우고 싶은 이름 하나가 따라왔지, K.

검정 차림이었어. 얼핏 보면 멋을 낼 줄 아는 듯한...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고, K도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어.

어색한 대화를 몇 마디 나누었지.

나는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고, 괜찮은 척했지만 부드러운 공기를 만들지 못했어.

너는 애써 이야기 사이사이의 틈을 메꾸려 했지.

창가 너머로 햇살이 찻잔을 비추었지만 내 손끝은 차가웠어.

날씨와는 달리, 그날 내 마음은 한 점도 따뜻하지 않았어.

K의 눈빛도, 말투도, 풍기는 기운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

에게 실망감이 밀려들었어.

'헛똑똑이야, 헛똑똑이.'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살살 달랬어.

너는 고등학생 때도 남자 친구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 반장을 하며 성별 구분 없이 두루두루 잘 어울렸지.

'이 사람은 정말 아데...'

마음속의 아우성으로 머릿속이 얽힌 실타래처럼 복잡했어.

겨우 차 한잔을 마시고 서둘러 일어섰어. 쭈뼛쭈 따라 나오는 네게 그냥 혼자 가겠다고 했지.

첫인상과 느낌은 참 중요해.

큰사위를 처음 보았을 때, 서글서글하고 동글동글한 웃음이 좋았어. 내 취향에 맞는 세 권의 책 선물도 고마웠지.

나는 그 집안도, 재력도 보지 않았어.

어느 직업이든 자기 가족 책임질 줄 알고, 화가 잘 통하며 서로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시 휴학하고 게 인터넷 업을 한다는 K는 끌리는 데가 전혀 없었어. 어지간하면 사람을 좋게 보는 나여서 너도 당황했던 것 같아.


고등학교 3학년 때, 너의 선생님은 우수한 성적이 아깝다며 재수를 강력히 권했어. 하지만 수시로 합격한 대학교가 네 실력엔 좀 못 미쳤어도 그냥 보내기로 결정했지. 아쉬운 결과였지만 재수의 끝은 구도 장담할 수 없었거든.

너는 종일 쩍거리다가 묵연히 부모의 말을 따랐어. 너와 어깨를 견주던 친구들이, 흔히 말하는 SKY대학에 입학하자 넌 점점 그 친구들을 멀리했지.

그리고 대학 2학년 즈음 각 대학 봉사단체 모임에서 타학교 복학생인 K를 만났어. 후에 캄보디아로 봉사활동을 떠나기도 했던 너는 K가 사회적 기업에 뜻이 있다며 관심을 보였지.

K를 만난 직후, 나는 체적으로 정확히 반대의 뜻을 네게 전했어.

그러나 내가 큰딸, 아들과 함께 나라밖에서 2년을 보낸 그 기간이 K에겐 절호의 스였지. 순진하고 외로운 너를 회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거야. K는 네게 자주 감상적이며 애절한 손 편지를 보냈고,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네 모든 말에 맞장구치며 감동시켰다더라.

후회는 늘 뒤늦게 찾아와.

네가 그 대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봉사활동에서 K를 만나지 않았다면, 서로 그렇게 엮이지 않았을 걸.

내가 떠나 있지 않고 너와 일상을 함께 했더라면, 넌 여전히 내게 고샅고샅 말하며 지혜롭게 처신했을 걸.

걸, 걸, 걸... 나는 끝없이 후회하며 가정해 봐.

그러면 너의 삶이 좀 더 평온했을까, 우리의 시간은 아프지 않았을까, 가슴에 남은 후회와 상처도 덜 수 있었을까...


나는 알아.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에 무의미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그러나 가끔 그 허망함에라도 기대고 싶어. 네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 속에 잠시라도 머물고 싶어.

넌 평소 그 꼿꼿한 자존심으로 좋게만 포장해 놓은 K의 이야기를, 내가 이렇게 꺼내는 걸 원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이즈음 K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

전부를 다 말할 수는 없더라도...


*사랑 앞에서 멈춘 마음

그날 이후,

너는 급격히 말이 줄어들었어.

에 오면 나보다도 네가 친구네서 데려 강아지를 더 반기며 챙겼지.

예전에는 작은 일에도 깔깔 소리 내어 웃었는데, 눈길을 피하며 강아지와 함께 네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았어.

함께 마주하는 시간이 서서히 사라졌어.

대학 입학 후 내가 해외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넌 쫑알쫑알 소소한 일까지 솔직히 말했지. 그런데 K를 만 뒤, 너는 무심 일상적인 대화만 던질 뿐이었어. 말수가 줄어든 만큼, 네 마음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

하필이면 그럴 때 는 2년 동안 네 곁에 없었고, 다시 돌아온 뒤에도 너는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지 않았어. 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했지.

넌지시 K의 말 꺼내면 그냥 가벼운 만남이지 결혼 아니라며 어물쩍 지나쳤어.

창밖에 비가 내리면, 같은 빗줄기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지.

나는 애가 탔지만 갈등의 골이 깊어질까 봐 더 이상 손을 뻗을 수 없었어.

그러다 는 어느 날

"헤어졌어."

하고,

또 어느 날은

"가끔 구처럼 보기로 했어."

하며 밀려갔다 부서지는 파도 같은 관계를 계속 이어갔어.

나는 애써 묻지 않기로 했지. 이별의 이유도, 다시 만나는 이유도 나름 고뇌의 결정이었을 테니까...

성장을 위해 한 번쯤은 딛고 넘어서야 할 젊은 날의 경험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시 네가 마음을 다쳐서 돌아올까 봐, 또 K를 완전히 놓지 못할까 봐 마음 죄며 기다렸어. 그렇게 애꿎간이 러갔지.

너는 졸업 전에 취업했어.

사람들이 '신의 직장'이라며 부러워하는 곳에서 활발하게 움직였어.

회사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관적으로 좋은 조건과 자격을 갖춘 사람들과의 소개팅을 마다 했지. 어쩌다 그 자리에 나가도 한 두 번 만나면 끝이었어.

이유는 상대가 너무 잘난 척하더라는 것과 아직 자기는 결혼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지.

나는 육아에 여념이 없던 큰딸에게 슬몃슬몃 네 이야기를 들었어.

경제력과 경험 부족으로 K는 인터넷 일의 종류를 수시로 바꿨어. 만 그럴싸하고 꿈만 컸지 현실성이 희박했어. 너는 K를 도우려 물심양면으로 부단히 노력했다지.

K는 나를 의식한 듯 마지못해 회사에 들어갔다가, 한 두 달 만에 그만두곤 했어.

큰딸도 둘의 사귐을 달가워하지 않았어.


첫인상과 첫 느낌은 정말 중요해.

네가 떠난 뒤에도 K는 변하지 않았어.

K는 끝까지 자기만 생각하는, 상상 초월의...


처음부터,

K 자신의 퍼즐 계획 속에 너를 한 조각로 얹어 놓은 건 아니었을까.

그가 숨기고 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정말 너를 사랑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