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아래, 너는 햇살이었어
* 봄, 너와 걷던 꽃길
안양천 물빛이 햇살을 품고 반짝이던 날, 나는 너와 나란히 걸었어.
벚꽃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와 우리 발끝을 부드럽게 감싸주었지.
그날 너는 어느 때보다 한결 홀가분한 모습이었어.
반년쯤 지나자 머리카락도 밉지 않게 자라고 있었지.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네 말에 나는 안도했고, 편안하게 그 봄을 받아들이고 있었어.
“엄마, 봄이 조잘조잘 말 거는 것 같지 않아? 밖에 나오니 정말 좋아.”
너는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었지.
네가 얼마나 그 웃음을 꾹꾹 눌러왔는지 알기에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어.
너는 천진한 아이처럼 뱅그르르 돌기도 하고, 하늘 보며 두 팔을 활짝 열기도 했어.
하늘이 참 푸르고 맑았어, 그날.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고, 너는 봄을 향해 마음껏 웃고 있었지.
어릴 적 너는, 벚꽃이 날리면 작은 나비가 날아다닌다며 폴폴폴 쫓아다니곤 했어.
손뼉을 짝짝 치기도 하고, 와아아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
"나비야, 나비야"
노래에 맞춰 벚꽃을 따라다니던 너의 모습이 선해.
그날은 마치 네가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어.
* 그날, 너는 봄 가운데에
너는 여전히 늘씬하고 당당했어.
짧은 머리가 너를 더 단정하고 또렷하게 만들었지.
머리 위로, 펼친 손바닥으로 벚꽃 잎이 날리자 넌 장난스레 소리쳤어.
“이 봄, 나한테 너무 꽂힌 거 아냐?”
나는 따라 웃었고, 네 말투와 표정에 얼었던 마음이 슬몃슬몃 녹아내렸지.
시원시원하게 앞서 걷던 네가 뒤돌아보았어.
“엄마, 여기 진짜 멋져!"
네 손짓에 나도 봄 한가운데로 끌려들어 갔지.
"이제 자주 바깥에 나와서 바람도 쐬고 그래."
내 말에 너는 곧 시무룩해졌어.
"머리가 이래서 톰보이 같다고 나가지 말래."
"무슨 말이야, 경쾌하고 좋은데."
나는 냅다 화를 냈어.
싱그럽고 유쾌한 너의 외출을 그렇게 막다니, 어이가 없었지.
"괜찮아, 머리 길러서 다니면 되지 뭐. 회사 나갈 때는 가발을 쓸까 봐."
너는 그냥 씨익 웃었어.
내 마음이 어둡게 가라앉는 걸 보지 못한 채...
그때가 첫 수술 후 일 년 남짓 휴직을 했던 어느 즈음이었어.
아픈 뒤, 너는 무엇이든 혼자 삭이며 참으려고만 했어.
바른말 잘하고 불의를 참지 못했던 네가 뭐든지 둥글게, 모나지 않게 보려 노력했지.
그러나 흔히 참는다는 것은 마음에 하나, 둘 벽돌을 쌓아가는 일이야.
나는 네 마음이 그 스트레스의 무게로 점차 야위어갈까 봐 걱정이었어.
"마음에 쌓아두지 말고, 네 맘껏 풀면서 살아."
너는 '그게 되나' 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다가 슬그미 눈길을 돌렸지.
그래도 너는 그날, 봄 가운데에서 벚꽃보다 더 해맑게 웃었어.
* 다 나을 거라 믿었던 그날
우리는 그날만큼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어.
수술은 잘 끝났고, 예후도 나쁘지 않아서 조심스레 희망을 품을 수 있었지.
“내년엔 예쁜 원피스 입고 벚꽃 구경 오자, 엄마.”
모처럼 들뜬 네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래, 꼭 그래야 해.'
나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어.
넌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을 이었지.
“앞으로는 내가 내 몸을 더 사랑하려고 해. 이 몸 하나로 여기까지 왔잖아.”
그 말에 나는 네 손을 꼬옥 잡았어. 그래, 맞아. 장해, 내 딸!
네 손은 따뜻했고, 그 온기는 지금까지 내게 남아 있어...
"근데 엄마, 먹는 거 가리는 게 좀 어려워."
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어.
"난 유기농 과일, 야채를 주로 먹는데 누군 끼니마다 고기를 먹어."
K는 육식광이라서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못 한다고 했어.
익숙한 그 냄새와 맛이 너를 힘들게 한다고 했지.
"고기는 나가서 사 먹으라고 해."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야속했어.
"음식점 거보다 집에서 좋은 고기 굽는 게 더 맛있대. 매번 사 먹을 수도 없고."
나는 저만치 9층을 흘기죽죽한 눈으로 올려다보았어.
"널 위해 얼마간 그것도 못 참는대? 평생 그럴 것도 아닌데. 내가 넌지시 말할까?"
"아냐, 아니야. 아는 척하지 마. 내가 그냥 대리만족할게. 그러니까 그럭저럭 참을 만해."
"에휴우우!"
참았던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지.
아픈 너와 잘 지내라고 여러 면에서 K를 배려해 준 것은 아무 소용없었어.
때마침 삽상한 바람이 불어 답답하고 울적한 내 마음을 다독거려 주더라.
너는 어릴 적부터 뭐든 잘 먹었고 특히 육류를 좋아했어. 그래서 키가 컸나 하고 생각될 만큼.
입사 후 얼마 안 돼서 건강검진을 한 뒤 네가 하하 웃으며 들어왔어.
"엄마, 나 키가 더 자랐어. 174센티래."
"정말?"
"근데 난 173센티가 좋아. 계속 173으로 할 거야."
164센티인 큰딸이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지.
"그 1센티 나 줘라."
"그래, 언니 가져라. 쑤웅!"
너는 결혼 후에 큰딸과 더 친해졌어.
서로의 애칭을 주고받으며 절친이라고 했지.
난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 나도 자매가 있었으면 하고 늘 바랐으니까.
떠난 후에 보니 둘이 나 몰래 주고받은 말과 글이 참 많더라.
위로는 되었을지언정 해결은 할 수 없었던 문제들... 안타깝고 안쓰러운...
어렸을 때부터 넌 남을 먼저 배려하고, 불쌍한 사람 못 지나치고, 인정이 많았어.
그래서 네가 K를 내치지 못한 건 아닐까...
언젠가 큰딸에게 '사랑보다는 의리 때문에'라고 했다지.
K는 결혼 후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어. 모든 것을 본인 위주로 행동하고 생각했지.
그럴수록 너는 감싸주기 급급했고, K는 점점 제멋대로였어.
집에 가도 제대로 인사를 안 했고 무표정으로 귀찮은 듯 한 마디 툭 던졌어.
우리와 마주치는 모든 자리에서 번번이 너를 당혹스럽게 하곤 했지.
그런 K의 태도에 내 발길이 뜸해지자 너는 밖에서 만나거나 K가 없을 때 집으로 오라고 했어.
그렇지만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어. 코로나가 극심할 때라서 편히 움직일 수도 없었고...
친정 식구들은 잠시라도 너를 볼 생각에 코로나 예방 접종을 3차까지 했는데, K는 혹시라도 부작용이 있으면 어쩌냐며 끝까지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지. 오로지 본인 중심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했어.
그리고 병원에는 동행하지 않으면서 친정 식구를 만날 때는 꼭 같이 왔지.
너는 어색하게 말하곤 했어.
"혼자 가겠다는데 자꾸만 따라오겠대. 걱정된다며."
무슨 걱정? 그게 무슨 의미였을까...
더 이상, K의 이야기는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둔갑시키고, 너 떠난 뒤 기막힌 일을 꾸민 것은 너무 경악스러워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이런 식으로 긴긴날들 순수한 너의 눈을 가린 것 같아 너무 맘이 아프고 쓰려...
그날도 우린 더 이상 K의 말을 하지 않았어.
벚꽃이 나풀나풀,
너와 내 어깨 위로 눈송이처럼 내리고 있었지.
* 그리고 나는, 지금도
해마다 나는 너와 함께 걷던 그 길을 걸어.
네가 떠나고 나서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집, 9층 너의 집이 저어기 보여.
아무리 그리워도 갈 수 없는 곳...
K는 네가 오롯이 장만한 그 집에 버젓이 살면서 우리와 연락을 뚝 끊었어.
전혀 틈도 없이, 너무도 차갑게.
네 유품을 함께 정리하자고 해도 묵묵부답, 문자를 보내도 말이 없고, 찾아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네 작은 물건이라도 버릴 거면 내게 보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도 들은 척하지 않아.
네가 하늘에서 다 보고 있을 텐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그렇게, 너 없는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뀌고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
이제 네 이야기에서 K를 내려놓고 싶어.
그를 흔적 없이 지우고 싶어...
벚꽃이 피면 나는 어김없이 너와 걸었던 그 길을 걸어.
꽃잎이 흩날리고, 벚꽃 그림자가 지면 나는 너의 그림자를 봐.
너의 걸음,
너의 웃음,
너의 그날의 말들.
그날의 봄은 끝났지만 너는 내 안에서 계속 피고 또 피어나.
네가 걸었던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너를 안고,
너를 보내고,
그리고 여전히 너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