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세 여자의 바람꽃 여행, 너를 그리다

사라진 시간 속, 너의 미소를 찾아서

by 제노도아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창가에 머문 아침.

햇살이 솔금솔금 마중 나온 날, 우리 셋은 조잘조잘 여행을 떠났어.

대학생이 된 너희들이 어른되는 길목에서, 함께 발걸음 가벼운 세상을 걷고 싶었지.

우리는 가끔 한자리에 모이면 끊임없이 이야기꽃을 피웠어.

너희들은 서로의 말에 답하고 웃으며 추억의 조각들을 맞추고, 미래의 꿈을 펼쳤어.

어릴 적 꾸러기짓할 때, 중고 시절 에피소드, 친구들 이야기, 관심 있는 상사...

우리의 이야기는 세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강물처럼 밤이 깊어도 끝날 줄 몰랐지.

말끝마다 꽃이 피어나듯,

웃음 사이마다 옹달샘이 솟듯,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은 한없이 즐거웠어.

우리의 여행 중 어느 조각들은 시간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반짝반짝 빛나.

그 조각들 중 몇 개만 살그미 꺼내 보려 해.

우리의 첫 여행지였던 필리핀, 그날의 바람이 널 데려와.


헌드레드 아일랜드햇살

바다 위에 동글동글 떠 있는 수많은 작은 섬들, 마치 아기자기 숨겨놓은 작은 놀이터 같았어.

너는 제일 먼저 신나게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물가에 앉아 그 모습을 찍느라 햇빛에 손등이 따가울 정도였어. 큰딸은 조심스레 발끝으로 물을 느끼며 너와 마주 보고 웃었지.

셋이 함께 찍은 사진 속엔 그날의 햇살과 너희 웃음소리, 바람과 파도소리까지 생생하게 담겨 있어.


세부 오슬롭 고래상어 함께

우리가 두고두고 감탄할 만큼 되새기던 장면이 있었지.

필리핀 전통 목선을 타고 바닷속에서 본 고래상어와 께 한 시간.

나는 스노클링 장비가 어색하고 물이 무서워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자꾸 바닷물을 들이켰어. 그런데 너는 처음 같지 않게 대담한 몸짓으로 커다란 고래상어들 옆으로 다가가더라. 너는 인어공주처럼 유연하게 고래상어들 사이를 매끄럽게 돌아다녔지. 마치 낯익은 고향길을 유유히 거닐 듯이 여유롭게...

너는 바닷속에서 내 손을 잡아끌며 부드럽게 몸을 움직였지만, 나는 겨우 눈을 뜨고 너희들의 멋진 유영을 신기하게 바라보기만 했어.

'때, 수영 배우길 참 잘했지?'라고 생각하면서.

그때의 수중 촬영 사진은 지금 봐도 정말 대단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뭉클한 감동을 주지.

돌아오는 길, 바람결에 젖은 머리를 말리며 우리는 서로 정겹게 바라보았어.

'이런 것이 바로 소소한 행복이지.'

말하지 않아도 함께 느낄 수 있는 따스한 마음, 그때 맞잡은 손의 온기는 평생 내 마음속에 남을 사랑이야.


별빛 반짝 반딧불이

생각나니?

칠흑 같은 어둠의 늪 사이로 조용조용히 노를 젓던 작은 배.

바람 스치는 소리와 물결이 나무배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어.

"엄마, 언니. 저어기!"

어둠이 짙어질수록 숲 언저리에 작은 불빛들이 점점 살아나기 시작했어.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석 알갱이처럼 빛나던 반딧불이 무리...

너는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하며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대로 눈길을 옮겼어. 팅커벨이 날아다니는 듯했지. 너는 동화 속 피터팬 같았어.

큰딸과 너는 손을 뻗어 반딧불이가 손등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것을 황홀하게 바라보았어. 반딧불이는 너희들의 머리와 어깨에도 살짝살짝 스치듯 머물다 가곤 했지.

나는 작은 배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별빛 반딧불이를 바라보는 것이 정말 좋았어.

너희들은 어릴 때부터 주위에서 칭찬받는 아이들이었어. 예쁘고 싹싹하고 예의 바른 아이들이었지.

평범한 엄마가 자랑스러워할 만큼 모나지 않게 동글동글 자라준 딸들.

누구에게 내놓고 자랑한 적은 없지만,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미소 짓게 하는 딸들이었어.


보홀섬 안경원숭이

홀섬에 몇 마리 안 남았다는 안경원숭이의 왕방울만한 눈과 성인 남자 손바닥만한 크기.

"아유, 귀여워. 주머니에 넣어 가고 싶어."

너는 만지지 못하는 안경원숭이 가까이 살금살금 다가가 요리조리 살펴보았지.

ET처럼 가늘고 긴 손가락을 보고, 네 손을 쭉 뻗어 흔들었어.

"안녕, 안녕! 또 올게."

소곤소곤 말했지.

'또 올게'란 네 말이 새삼 가슴에 사무쳐...

"언니, 이티 같은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호기심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너는 이야기를 꾸미며 흥겹게 대화를 이어나갔지.

나보다도 더 동화를 잘 쓸 것 같은 너희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조잘거리는 새소리가 들리는 듯했어.

넌 1200개 남짓 볼록볼록 작은 언덕처럼 솟은 초콜릿 힐을 보고 키세스 초콜릿 같다며 웃었지.


비간의 작은 스페인 마을

오래된 벽돌 건물과 짙은 색 창문. 옷을 벗은 무잡잡한 아이들이 뛰노는 좁은 골목길, 스페인의 유쾌한 리듬이 흐르던 그곳.

리는 할로할로(필리핀식 빙수)를 먹으며 음악에 맞춰 고갯짓하 발을 까딱거렸지.

우리들의 웃음마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했던 시간.

집에 돌아와서 팥빙수를 먹으면서도 자주 말했던 할로할로였어.

너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따호(필리핀 순두부)와 기니따안(코코넛 밀크를 넣어 만든 음식)을 좋아했어.

너희는 어깨에 양철통을 메고 다니며, "따호, 따호!"를 외치는 소년을 자주 부르곤 했지.

이런 사소한 웃음들과 잔잔한 기억들이 쌓여서 언젠가 내 마지막 날에 너희 둘이 나를 따뜻하게 떠올려주리라 믿었지.

그런데 그날이 오기도 전에, 네가 먼저 내 추억이 되어버렸어...


그 이듬해 방문했던 중국의 청도.

현대적인 도시 속에서 어쩐지 우리가 동화 속 주인공 같았던 시간.

유리 빌딩 사이로 스쳐가는 불빛들, 밤이면 분수쇼가 펼쳐지는 광장에서 우린 빛나는 순간을 함께 했지.

그곳으로 떠나던 날, 하늘은 맑고 바람은 아직 서늘했지만 한껏 기대에 부푼 풋풋함과 설렘으로 가득했어.

고운 햇살 아래, 이름 모를 골목을 따라 걷다 향기로운 찻집 앞에서 우리는 멈지.

너희들은 서로 장난을 주고받으며 서툰 중국어를 옹알이처럼 중얼거렸어.

네 작은 메모장엔 기본적인 일상 중국어가 적혀 있었지.

"엄마도 이거 보면서 물건 살 때 한 번 물어봐요."

난 손사래를 치며 메모장을 밀어냈어.

그런 모습을 보며 너희들은 깔깔 웃었지.

난 너희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뿌듯하고 즐거웠어.

함께 하며 웃음 짓는 순간이 그림처럼 마음에 스며들었지.

너희들은 청도에 왔으니 칭따오 맥주는 당연히 기본이 아니냐며 신나 했어.

그날 밤, 큰딸이 웃으며 말했지.

“엄마랑 처음으로 건배!”

장난스러운 눈빛에 어른스러움이 섞여 있었어. 우리는 경쾌하게 잔을 부딪혔고, 웃음이 방 안을 채웠지. 그렇게 세 여자의 여행은 익어어.

나는 잠든 너희들을 보며 생각했어.

‘너희가 내 곁에 있어 줘서 맙고 바랄 게 없어.’

다음날, 시장에서 군밤을 사 먹고 향긋 차를 마시며 우리는 각자 가고 싶은 여행지를 말했어. 너는 눈을 반짝며 입을 열었어.

“쿠바에 가고 싶어. 음악과 낡은 자동차, 바다. 정말 낭만적일 것 같아.”

“다 같이 가자, 꼭!”

우리는 가락을 걸며 약속했어.

"엄마, 나 진짜 행복해.”

너는 나비포옹하며 말했지.

"도. 우리 셋이라서 더 좋아."

큰딸이 맞장구쳤어.

함께라서, 더 밝았고

함께라서, 더 행복했던 그 순간들...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잔교를 걸었어.

바다 위로 길게 뻗은 다리를 셋이 나란히 걸을 때 네가 내 손을 꼭 잡았어.

“엄마, 여기 참 예뻐. 다음에 또 같이 와요.”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 그 속에 우러진 네 목소리가 오래도록 귓전에 머물렀어.

우리 셋의 그림자가 바다 위에 떠 있었지.

그날 잔교 끝에서 큰딸과 함께 손을 흔들며 외치던 너의 목소리.

“엄마, 다음엔 배 타고, 더 멀리 가.”

러던 너는 멀리멀리 더 먼 곳으로 먼저 떠났어...


나는 언제나 바다 끝에 서면,

네가 그날처럼 내 손을 잡을 것만 같아 손을 펴곤 해.

너는 이제 더 먼바다 너머, 내가 닿을 수 없는 하늘에 있지만 나는 알아.

그날 우리 셋이 찍은 사진 속 웃음처럼, 너는 지금도 환하게 웃고 있을 거라 걸.

언젠가 또 그곳에 간다면, 나는 말없이 잔교 끝에 서 있을 거야.

바다와 하늘을 보고 손을 흔들며, 속삭이듯 너를 부를 거야.

“다시 한번, 우리 함께 걷자.”

너는 웃으며 달려와 내 품에 안기겠지.


남은 우리는 이제,

기억과 함께 너를 안고 길을 떠날 거야.

너와 셋이 떠났던 그날처럼,

너와 함께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