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한 바람의 여행 1
계절에 따라 바람의 냄새는 달라.
봄은, 꽃샘 향기
여름은, 초록 이파리
가을은, 알록달록 단풍
겨울은, 하얀 목화솜
네가 우리 곁을 떠난 뒤,
큰딸과 나는 오랫동안 너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
어느 땐 멀뚱멀뚱 먼산바라기를 하기도 하고,
어느 땐 서글픈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어.
가슴 한구석이 비어버린 채,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냈지.
2년 남짓된 어느 날, 큰딸이 조심스레 말했어.
"엄마, 우리... 떠나볼까? 셋이 함께."
그렇게 우리는 그 여름, 북쪽 바람을 타고 떠났어.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을 나오자 싸늘한 바람이 스쳤어.
그런데 이상스레 따뜻하게 느껴지더라.
마치 네가 먼저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큰딸과 나, 캐리어는 두 개였지만 우린 셋이었지.
아름답고 깨끗한 거리와 알록달록 건물들이 그림책처럼 늘어선 뉘하운 항구.
지붕 없는 유람선에 탄 사람들이 즐겁게 손을 흔들었어.
이럴 때 너라면 두 손을 높이 들고 같이 소리쳤을 거야.
밝고 경쾌한 네 목소리가 울렸어.
큰딸이 너와 함께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지.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평안한 얼굴로 지나갔어.
햇살은 부드럽고, 거리는 평화로웠지.
길가 가게들을 둘러보고 옷 가게를 기웃거리던 큰딸이 말했어.
"분명 저런 꽃이 그려진 옷을 고를걸."
꽃무늬 화려한 치마를 입고 뱅그르르 도는 너를 보았어.
내 입은 웃으면서, 눈시울은 붉어졌어.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우린 함께였어.
"바닐라 초콜릿 맛? 딸기 맛?"
아이스크림을 사기 전에 큰딸은 네가 곁에 있듯 물었어.
달콤한 맛이 셋이 함께 먹었던 아이스크림 같았지.
"살쪄, 조금만 먹기!"
말로만 그럴 뿐, 우린 모두 아이스크림의 여왕이었어.
누구랄 것도 없이 아이스크림을 먼저 잡는 사람이 으쓱였지.
먹는 취향도 비슷해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시키든 다 잘 먹고, 즐거워했어.
우리의 그림자는 늘 셋이었지.
나는 언제나 너의 선명한 그림자를 볼 수 있어.
뉘하운 거리의 세 군데 건물에서 안데르센이 살았대.
20번지는 거의 20년 동안 머물렀대.
우린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어. 셋 다 안데르센을 좋아했지.
네가 어릴 때 듣고 불쌍하다며 울었던
'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 '미운 오리 새끼', '눈의 여왕' 등을
그 시기에 썼대.
80센티 정도 된다는 작은 인어공주상 앞에서 네가 먼저 말했어.
"언니, 나 이거 정말 보고 싶었어. 같이 사진 찍어줘."
큰딸은 인어공주와 하늘을 담아 정성스레 사진을 찍었지.
어때, 그 사진?
네가 인어공주와 함께 찍은 사진을 나도 갖고 있어.
인어공주 위로 하늘이 보이고 너의 웃는 모습도 보여.
노르웨이 프롬 열차에서 큰딸은 내 앞, 너는 내 옆에 앉아서 연신 탄성을 질렀어.
험준한 산, 절벽과 협곡 사이를 가르는 그 길 위에서 세상사가 잠시 멈춘 듯했지.
그때
거대한 절벽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커다란 폭포 앞에서 열차가 멈췄어.
우리는 밖으로 나갔어.
힘찬 물보라가 옷과 얼굴을 적셨지.
음악이 울려 퍼지고 전설 속의 여인 훌드라가 물안개와 물보라 사이에서 춤을 추었어.
훌드라는 숲의 여신인데, 사랑을 잃고 울음을 그치지 않아 지금의 폭포가 되었대.
빨간색 드레스의 훌드라는 아직도 그 물결 속에서 슬픈 춤을 추고 있어.
동화의 한 장면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그 여인이 바로 너 같았어.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훌드라와 한마음이 되었거든.
빨강 목도리를 제일 좋아하던 너, 못다 한 사랑을 안고 떠난 너.
그리고 우리는 피오르드를 보았어.
까마득한 절벽과, 하늘을 담은 파란 호수.
그 웅장한 자연 앞에서,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어.
바람이 불면, 네가 우리 곁을 스쳐갔고 그럴 때마다 나는 너의 손을 잡았어.
우리의 삶이 긴 것 같아도 저 자연을 보면 얼마나 짧은지,
네 삶을 봐도 얼마나 안쓰러운지, 자꾸만 마음이 저려왔어.
배에서 내려 잠시 말없이 걷던 우리는 고즈넉하고 아담한 카페로 들어갔어.
코끝이 빨개지고 추위를 타는 우리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지.
"루돌프 사슴코는 안 봐도 뻔해. 우리 코를 보면 돼."
겨울이면 유쾌하게 웃으며 코를 감싸쥐던 너.
큰딸은 내 얼굴을 말끄러미 보더니 작은 메모지를 꺼냈어.
우리 여기까지 왔어.
너도 함께 걷고 있지?
보고 싶어...
나는 눈을 감고, 환하게 웃는 너를 떠올렸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물을 삼켰지.
"그럼 우리 셋이 떠난 여행이잖아."
"맞아, 우린 여전히 셋이야."
너의 웃음, 목소리, 걸음걸이까지 또렷이 기억해.
익숙한 모습으로 우리는 함께 걷고 있었지.
큰딸이 젖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어.
백야라 밖은 그리 어둡지 않았지만,
곧 너는 두 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찾아와
우리와 함께 잠자리에 들 거야.
크루즈 선덱에서,
노랑나비로 찾아온 너를 만난 뒤 우리는 늘 가운데 자리를 비워놓았어.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시간을 보내든,
너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
어스름 저녁,
숙소에서 가까운 슈퍼마켓에서
예전 여행길에 먹었던 납작 복숭아를 찾았어.
"어, 엄마가 말했던 복숭아다!"
당도가 높은 그 복숭아를 너에게도 맛 보이고 싶었어.
큰딸은 복숭아를 잘 씻어서 별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놓았지.
그날 밤 너의 아삭아삭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어.
우리는
항상 셋이야.
그리고 앞으로도, 셋 일 거야.
언제까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