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 한 바람의 여행 2
새벽안개 사이로 햇살 스미듯,
우리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지.
바람이 몸을 감싸듯 불어왔고, 그 바람을 따라 발을 옮긴 거야.
우린 마지막 여행지의 아쉬움을 안고, 서로의 온기를 전했어.
눈물이 고이지 않도록 손을 꼭 잡고 있었지.
언제 또다시 이런 여행지에서 함께 만날지...
그러나 이 여행은, 마치 오래전 예정된 듯했어.
우리의 그림자는 변함없이 셋이었지.
북유럽의 맑고 파란 하늘 아래, 우리는 오슬로에 닿았어.
뭉크 미술관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너는 쉴 새 없이 종알거렸지.
“우아! 내가 엄마, 언니랑 뭉크 그림을 직접 보다니.”
너는 평상시, 걸핏하면 놀라는 표정으로 뭉크의 절규를 흉내 내곤 했어.
‘어머, 정말, 에궁’ 같은 감탄사를 할 때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입을 크게 벌렸지.
장난스러운 너의 그 표정이 걸어가는 동안 더 선명하게 다가왔어.
감정 표현을 잘했던 너는 언제나 밝은 소녀 같았어.
길가에는 한 여인이 뜨개질로 아기의 작은 신 윗부분을 짜고 있었어.
유난히 아기를 좋아했던 너는 쪼르르 그 옆으로 다가갔지.
색색의 작은 신들을 신기한 듯 요리조리 보던 네 모습에 마음이 저렸어.
항암치료로 그렇게 좋아하는 아기를 가질 수 없었던 너.
그래서인지 조카가 태어날 때부터 떠나기 한 달 전까지도 알뜰히 챙겨줬던 너.
조카를 딸처럼 정말로 아끼고 예뻐했는데...
너는 아기 신을 보다가 옆 골목길로 가자고 했어.
우리는 여행을 가면 큰길보다는 작은 골목길을 더 좋아했지.
골목의 구석을 더듬으면 신기하고 특이한 것들이 눈에 띄곤 했어.
골목을 벗어나 작은 사거리에 아담한 성당이 있었어.
성당은 잠겨 있었지만, 첨탑의 십자가는 눈부셨어.
성당 옆을 지나던 너는 문득 액세서리 노점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지.
나무 그늘 아래 수레 위엔 다양한 목걸이, 반지 등이 반짝거렸어.
“엄마, 우리 여기 온 기념으로 똑같은 반지를 사요.”
가늘고 긴 너의 손가락이 아른거렸어.
큰딸과 함께 반지를 고르고 고르던 네가 하나를 집었지.
링 위에 왕관이 있는 반지였어.
“언니, 이거 어때?”
너는 어릴 때 생일이 되면, 티아라 쓰는 것을 좋아했어. 그날은 온종일 벗으려 하지 않았지.
큰딸이 그런 너를 ‘공주님’이라고 부르며 최고 기분 좋은 날로 만들었어.
우린 셋이 자기 손가락에 맞는 반지를 골랐어.
큰딸은 약지에 두 개를 꼈어.
“일단 내 거는 엄마에게 맡길게. 잃어버리지 마요.”
너는 큰딸의 반지 하나를 내게 건넸어.
그날 네가 맡긴 반지는 내 가방 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
너를 다시 만나는 날, 고운 네 손가락에 끼워줄게.
반지를 산 네 발걸음은 한껏 경쾌했어.
오슬로의 작은 흔적, 너와 셋이 나눈 정표. 나는 자주 그 반지를 끼곤 해.
“엄마, 빨리 뭉크 미술관에 가요. '절규' 그림 앞에 선 사람들 모습, 그 느낌이 궁금해.”
미술관의 은빛 유리 건물 앞에서 멈춰 선 우리는 우선 숨 고르기를 했어.
건물 안에 네가 보고 싶어 하는 그림이 있다는 것이 숨을 가쁘게 했거든.
우리 셋은 기대와 호기심을 품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어.
층층 전시장의 벽면을 따라 걸었지.
회색, 붉은빛, 검은 선의 그림들과 의외로 밝고 따뜻한 그림도 많았어.
우리는 마침내 '절규' 앞에 섰어.
붉은 하늘, 비명을 지르는 얼굴...
뭉크는 어느 날 저녁, 친구 둘과 길을 따라 걷고 있었대.
한쪽은 마을이, 뭉크 아래에는 피오르드가 있었대.
뭉크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는데, 해가 지고 구름이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대.
뭉크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고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는데,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대.
나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먹먹했지.
절규와 침묵...
병원 침대 위에서 마지막까지 '사랑해'라고 말하던 너의 목소리.
나는 절규 뒤에 있는 너의 눈물을 본 듯했어.
뭉크 미술관을 나서니 햇살이 한결 따뜻했어.
노벨 평화센터로 향하던 길, 사람들의 말소리가 멀리 들렸지.
너는 평소처럼 평화와 정의를 이야기했어.
“엄마, 싸우는 세상 말고 서로 위하고 사랑하는 세상이면 좋겠어.”
매년 12월에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열리는 시청사의 붉은 벽돌 아래, 길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어.
나는 그 그림자 속에서 또렷한 너의 발자국을 보았고, 눈을 떼지 못했지.
너는 그렇게 우리의 시간 속에 남아 있고, 우리와 함께 원하던 길을 걸어가고 있었어.
오슬로를 떠나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잔잔한 음악 같았지.
구시가지의 중심인 감라스탄은 우리 취향과 맞았어.
아름답고 중후한 중세 시대의 건축물들이 잘 보전되어 있었지.
“사람도 오래오래 저 건물들처럼 흔적을 남기면 좋겠어. 잊힌다는 것, 그것은 잃어버린 것보다 더 슬픈 것 같아.”
네가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어.
“너는 안 그럴 거야. 엄마와 내 마음에 영원히 남아 있어.”
큰딸이 단호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지.
그제야 네 얼굴은 부드럽고 편안해졌어.
좁은 골목을 걸을 때, 너는 속삭였어.
“엄마, 이렇게 예쁜 데서는 바싹 붙어서 사진 찍어야 해.”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색이 바랜 노란빛 벽돌 건물들,
그 사이를 걷는 우리의 발걸음은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여행 같았어.
그림 같은 거리의 창문마다 작고 둥근 화분이 놓여 있었지.
그 속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어.
그 꽃들이 마치 너 같았어.
사람들 틈에서 조용히 피어 있다가,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진 너.
333년 만에 건져 올려졌다는 배, 바사호.
물속에서 건져 올린 배의 뼈대는 오래된 기억처럼 무거웠어.
그 배가 침몰하던 날, 아무도 그 배가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처럼
너를 보낸 날도 나는 그날이 끝이 될 거라고 믿지 않았지.
너를 보낼 준비를 하지 못했던 시간.
가라앉은 배처럼, 우리의 시간도 너무 빨리 무너져버렸어.
너는 말했어.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기억해야 해.
지금 즐겁게, 지금 아름답게, 지금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해.”
너는 나와 큰딸의 손을 꼭 잡았어.
바다로 둘러싸인 헬싱키에서 너는 큰소리로 말했지.
“잊지 마, 무민 인형 사서 율리아에게 전해줘. 알았지?”
너는 조카 사랑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어.
우린 고개를 끄덕였지.
“난 이제 돌아가야 해. 이번 여행 함께 해서 정말 행복했어.
그리고 비행기 타고 하늘이 더 가까워지면 평안하게 웃어줘.
그 어디 즈음 내가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을 거니까.”
너는 맑은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 보았어.
큰딸이 울음을 터뜨리자 너는 어깨를 다독였어.
“울지 마, 언니. 우린 언제나 함께 있고 또 만날 거야.”
너는 늘 그렇게 ‘함께’를 말했지.
함께 먹고,
함께 걷고,
함께 웃자고...
너는 나를 따뜻하게 안았어.
“엄마, 행복해야 해. 우리 또 만나요!”
우리는 다시 한번 서로를 얼싸안았어.
마리따, 정말 고마워.
우리는 함께 걸었고,
함께 보았고, 함께 했어.
너와 같이 여기까지 왔고, 네 덕분에 내가 이 바람을 느꼈어.
너는 북쪽 도시의 바람 속에서도 웃고 있었지.
집으로 돌아갈 시간,
창밖 활주로 너머로 말간 햇살이 비쳐.
헤어짐이 끝이 아니라는 걸, 네가 언제든 우리 곁에 올 수 있다는 걸 알았어.
우리는 너와 함께 했던 모든 기억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거야.
우리 셋은 다시 만날 거야.
다시 걷고, 다시 웃고,
그리고 다시 사랑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