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랑의 무게, 손끝으로 만지는 너의 마지막

다시 너를 꺼내 보다

by 제노도아

윤슬 같은 바람결이었지.

바람이 내 슬픔을 조심스레 어루만졌어.

그저께, 38번째 너의 생일이었어.

따뜻한 햇살 안에 네가 있는 것 같았지.

여전히 웃고 있는 네 사진 앞에서, 내 마음은 가녀린 나뭇잎처럼 떨렸어.

"참 예쁘게도 웃네, 내 딸!"

천천히 네 얼굴에 내 얼굴을 맞댔어.

눈물이 또르르 굴렀지.

동행한 친구가 내 어깨를 토닥거렸어.

"이토록 가까운 거리인데 손끝 하나 닿을 수 없다니..."

나는 긴 한숨을 쉬었어.


시간은 다시 그날의 끝으로 나를 데려갔어.

아프지도,

슬프지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요했던 네 마지막 얼굴...

네가 지금 있는 그곳은 일 년에 한 번,

사진 있는 대리석 작은 문을 열고, 그 안의 유골함을 볼 수 있어.

서로가 좀 더 가까워지는 느낌의 시간이지.

문을 열 수 있는 우선권은 남편이었던 K에게 있는데,

K는 3년 동안 한 번도 문을 연 적이 없어서 해마다 우리가 열지.

봉안당을 나서는데, 보드레한 바람이 내 뺨을 쓰다듬었어.

"엄마, 와 줘서 고마워요."

네가 속삭이는 듯했지.


너를 보내고 나서

전 사위였던 K는 방 정리가 좀 된 다음에 오라더니,

어느새 세 해가 흘렀고 지금까지 오라는 말 한마디가 없.

아직도 그 방에는 너의 기척이 남아 있을 거야...

런데 너 떠나고 여러 달 지난 어느 날,

갑자기 K는 네가 남겼다는 의문의 인쇄 종이 한 장을 보냈지.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네 사인 하나로 모든 게 결정된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K는 너의 마지막 흔적마저 송두리째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어.

우리가 알고 있는 너는, 절대로 그런 아이가 아냐.

홀연히 떠나게 된 이 세상에 그런 것을 남길 아이가 아니라는 거지.

엄마인 내가, 언니인 큰딸이, 가족들과 친구들이 왜 너를 모르겠니.

어이없고, 속상하고, 무엇보다도...

증명할 네가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 또 아프게 해.

세상은 법의 무게로 너의 시간을 재려 하지만,

나는 옳은 이의 양심을 믿고 무엇보다 너를 믿어.


바람이 연거푸 마음을 다독거려.

얽힌 생각에서 벗어나 함께 머물 때의 너를 떠올려 봐.

넌 슬몃슬몃 스치는 향기도, 맛있는 냄새도 잘 알았어.

우리 단골이었던 작은 분식집 기억나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폴폴 풍기는 맛난 냄새를 못 참고 들르곤 했지.

동네 떡볶이 가게를 지날 때마다 네 생각을 해.

"나으면 제일 먼저 떡볶이를 먹어야지."

의식이 남아 있던 마지막 날까지도 넌 그랬어.

치료 때문에 음식 제한이 많았던 너는 그리 좋아하던 떡볶이도 끊었지.

전에는 매운 떡볶이를 입에 넣고, 연신 “맵다, 맵다” 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어.

“이거, 엄마도 한 입 먹어 봐요. 입에 불나게 맛있어.”

그 말이 귀에 쟁쟁해.

네가 대학 다닐 때, 친한 지인의 부탁으로 몇 달 했던 수학 과외.

처음 과외비를 받던 날이었어.

‘내가 쏠게’ 하며 당당하게 앞장섰던 그때,

큰딸과 우리 셋은 배가 빵빵하게 떡볶이 4인분을 먹었지.

“엄마, 언니. 이거 내 첫 벌이로 산 떡볶이야!”

너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스레 말했어.

그날을 잊을 수 없어.

하하 웃던 너의 웃음소리, 그 몸짓...


하루는,

네가 입던 스웨터 하나를 옷장 깊숙이에서 꺼냈어.

굵은 꽈배기 모양의 밤색 니트, 겨울마다 네가 즐겨 입던 옷.

목이 좀 늘어났고, 보풀이 약간 있지만 그 안에는 네 체온이 남아 있어.

나는 코를 묻고 희미한 네 향기를 맡고 또 맡았어.

그걸 안고 한참 소리 없이 울었지.

너 떠난 뒤, 참 많이 울어서 눈물도 말랐겠지 했지만

네 생각은 샘물 솟듯 눈물샘을 자극하곤 해.

나는 새 옷도 빨아서 헌 옷처럼 입길 좋아하는데,

특히 딸들이 입었던 옷과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좋아했어.

어릴 때 딸들이 내 옷을 입고 좋아했던 것처럼...


네가 마지막으로 건넸던 가죽 가방을 하나씩 꺼내 봤어.

“엄마, 이거 내가 좋아하는 가방들인데 어깨에 무게감이 있어서... "

겨드랑이 림프선으로 번진 병, 수술 후 너는 그 팔에 늘 압박붕대를 매고 다녔어.

가방을 받을 땐 네가 내게 뭔가 주고 싶어 한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지금 되돌아보니, 네 손때가 묻은 가방의 익숙한 온기는 내게 남긴 네 사랑의 온도였어.

그리고 작은 상자 하나.

그 안에는 네가 결혼 전 했던 귀걸이, 반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어.

너는 진주 귀걸이를 달랑거리면서,

“어때, 우아해 보여?”

하고 턱을 치켜들며 도도한 표정을 지었지.

큰딸이 '따봉!' 하며 맞장구를 쳤어.

화장기 없는 얼굴로 활짝 웃던 너, 너는 잡티 없는 민낯이 더 예뻤어.

그 모습이 어찌나 선명한지 지금도 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아.

너의 체온, 너의 웃음, 너의 취향.

네가 남긴 것을 나는 대로 직하고 있어.

그 안에 너의 계절과 정겨웠던 시간들이 담뿍 담겨 있어.

너 떠나고,

집에 오지 못하게 하는 K에게 몇 번이나 간곡한 말과 글을 보냈어.

"내겐 마리따의 손수건 한 장도 소중하니까 필요한 것은 다 추리고,

나머지는 작은 물건이라도 버리지 말고 전부 내게 보내줘."

하지만 오늘까지 네 물건은 단 하나도 내게 오지 않았어...


나는 오늘도

네가 남긴 온기를 기억의 조각들로 꿰매그리움으로 엮고 있어.

사랑하는 내 딸,

부디 그곳에서는 햇살 같은 평안 속에 머물기를...


나는 이제

너의 이야기를 서서히 마무리 지으려고 해.

남은 글의 두 장에서는 너의 기억 속으로

천천히, 너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