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촐한 밥상에 담긴 위로
아침 산책길이었다.
서서히 가을빛이 묻어나는 바람 속을 천천히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몇 번 이야기를 나누었던 한 할머니를 만났다.
다리가 불편하셔서 조금 걷다 중간에 멈추신 듯했다.
그분은 나무 벤치에 앉아 내게 손짓하며 앉으라고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옆에 앉았다.
나무 그늘 아래라 솔솔바람이 불었다.
"시간 있음 내 이야기 좀 들어줄려우."
"무슨 일 있으세요?"
할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속에 쌓인 이야기를 한숨처럼 풀어놓으셨다.
사업이 잘 안 되는 자식 걱정, 아픈 다리의 고통, 세월에 대한 원망들...
나는 그저 묵묵히 들어드리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 짧은 시간이 할머니에겐 위로였는지 눈가에 잠시 물기가 맺혔다.
"고마워요, 내 말 잘 들어줘서."
할머니는 2년 전 돌아가신 내 엄마와 같은 연세였다.
"어구구, 나 좀 일으켜줘요."
혼자 지내신다는 할머니는 가까이 있는 집까지 같이 가자고 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들어선 작은 아파트, 깨끔스레 정돈이 된 방안.
"잠깐만 기다려줘요."
할머니는 불편한 다리로 쟁반에 받친 아침상을 내오셨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치찌개, 갓 지은 밥, 동치미, 오이소박이, 열무김치, 미역줄기 무침, 멸치조림.
"아휴, 왜 이런 걸...."
내가 손사래 치며 당황하자 편히 앉으라고 했다.
"거기 앉아 있으면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요. 어떤 늙은이가 앉아 있나 보다 신경도 안 쓰지."
할머니가 쓸쓸하게 말했다.
나는 혼자 지내시던 엄마를 보듯 마음이 아렸다.
"그런데 나를 처음 아는 척해줬어요. 곧 이사를 가는데, 꼭 한 번 밥 해주고 싶어서 기다렸어요."
할머니는 먼 시골로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몇 달 전, 할머니는 다리를 절룩이며 의자에 앉았다. 지팡이를 옆에 두었는데 스르륵 미끄럼을 탔다.
마침 그 곁으로 지나가던 나는 얼른 지팡이를 집어 드렸다. 그것이 인연이었다.
나는 가끔 산책을 나갔고, 할머니도 날마다 나오지는 않으시는 듯했다.
"이사 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또 가야 하네."
할머니의 음성이 나지막이 가라앉았다.
"어서 먹어요, 식기 전에. 오늘쯤 나올 것 같아서 일찍 준비했어요."
나는 고맙다고 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아침으로 이미 요거트와 과일을 먹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정갈하면서도 깊은 맛, 넉넉하면서도 소박한 차림. 엄마의 상차림이었다.
값비싼 재료가 아니어도, 익숙하게 입안에 느껴지는 감칠맛.
엄마의 손에서 나온 밥상은 언제나 몸과 마음을 살찌게 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위로와 힘은 엄마의 그런 손맛에서 비롯된 것 같다.
엄마의 손맛을 나는 할머니의 밥상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솟구치는 눈물을 얼른 삼켰다.
조촐하고 소박한 상차림이 그 무엇보다도 짙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할머니의 살아온 날들과 정성이 밴 음식들.
흙내음 풍기는 손으로 자식들을 돌보던 그 세월.
잘 모른 이의 작은 친절을 잊지 않고 정성을 담아 차린 아침상...
할머니의 인생 손맛이었고, 내게는 오래오래 남을 기억이 되었다.
몸을 살리는 음식보다 마음을 살리는 음식이 있다는 것을, 엄마의 손맛과 할머니의 손맛이 가르쳐주었다.
며칠 뒤 들른 그 집에 할머니는 없었다.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눈 그 밥상을 나는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