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비두비두밥 Oct 18. 2023

4. 교수님의 농담

2023.06.03

 이유는 모르지만 교수님께서 하신 농담은 농담이라고 적으면 안 될 것 같다. 조선 시대 양반들의 '농' 같은 단어로 적어야 하나. 아니면 유머라고 외래어를 써볼까. 농담은 학부생들이 시시덕거릴 때 쓰는 느낌이 든다. 우스갯소리는 너무 격 없어 보이고. 대체 교수님께서 하신 재미난 말씀은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사실 일기를 쓸 때를 제외하곤 메모장에 재밌는 이야기가 담기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한 메모가 예외적으로 교수님의 농담 혹은 농담이라 부르기 버릇없어 보이는 그런 말씀을 기록해 놨다.


 답사를 갔다가 지친 엉덩이를 붙일 겸 카페에 들른 적이 있다. 교수님은 예상대로 문제의 아이스 카페 라테를 주문했다. 이야기는 흘러 흘러 자식 교육이라는 주제에 정착했다.


"예전에 어떤 홍콩 배우가 재산 8000억을 기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배우의 아들딸이 엄청 반대했다고 하더구나."


 나는 입바른 소리를 참지 못했다. 내 도덕성을 교수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배우가 자식을 잘 키웠으면 반대를 안 하지 않았을까요? 아버지 뜻이니 인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수님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그 반짝임을 조심하는 법을 좀 배워야 했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었는데도 여전히 겁 없이 덤비는 습관을 못 버려 문제였다.


"00이 너는 어쩔 건데?"


"네?"


"만약에 00이 아버지께 8000억이 있어. 그런데 그걸 다 기부하시겠대. 그러면 어떻게 할 거지?"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았던 친구를 봤다. 구조 요청을 보냈지만 친구는 모른 척했다. 하는 수 없었다.


"말려야죠!"


 조금 부끄러웠지만 솔직한 게 차라리 나았다. 나중에는 솔직하지 않아서 농담에 휘말렸다.


 계획에 없던 저녁을 답사 후에 먹으러 갔다. 순댓국과 족발을 두고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술로 흘러갔다.


"00이는 술 좋아하니?"


 회식 때 사건이 떠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적어도 유지하려고 노력은 했다.


"좋아하지는 않는데 분위기가 좋아서 가끔 마십니다."


"그건 그냥 좋아하는 건 아닌가?"


 옆에서 친구가 못 참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밖에서 거의 마시지 않는다고 둘러댔지만 친구의 웃음이 모든 진실을 밝혔다. 그래도 그날은 교수님이 재밌는 말씀을 많이 해주신 날로 기억에 남았다.


 저녁을 먹기 전에는 한약재를 파는 경동시장에 갔다. 한약 달이는 냄새가 나자 교수님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했다.


"너희도 총명탕 그런 거 마시니?"


"아뇨! 마셔본 적 없습니다."


"우리 대학원생들이 공부 잘하려고 시험기간만 되면 총명탕을 마시는데. 글쎄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아."


 친구와 웃으면서도 나는 등골이 서늘했다. 간절하게 총명탕을 마시는 것이 혹시 졸업한 후의 내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낮에는 청계천을 따라 걸으면서 교수님의 역사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복개 사업과 복원 사업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던 중이었다.


"청계천 고가도로가 철거된 지 생각보다 얼마 안 됐을 거야. 2003년이니까. 너희는 청계천 고가도로 타 본 적 있니?"


 나는 친구를 흘깃 봤고 친구도 나를 흘끔 봤다. 결국 내가 말문을 뗐다.


"철거됐을 때가 2003년인데 저희가 2002년생입니다, 교수님."


 교수님은 잠시 할 말을 잃으신 듯했다. 너희가 그 월드컵 베이비구나. 네 맞습니다. 그런 어색한 대화가 오가다가 끊어졌다.


 글을 쓰려고 메모를 다시 읽다 보니 나와 친구가 교수님 시선에는 얼마나 조그맣게 보일지 아득하기만 했다. 답사를 다녀온 날의 메모는 다시 꺼내봐도 즐거운 사진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이전 03화 3. 교수님의 전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