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1 : 이디야 쉐이크, 짬뽕주의 탕수육짱뽕밥, 베이비스타 도네카이
출산이 임박했다. 병원에서 진통 오면 바로 예약한 곳으로 가라며 당부했다. 운동도 열심히 하란다. 괜히 그러니까 몸을 사리게 된다. 이번 주에 아이가 안 나오면 나는 병원에 가서 내진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내 인생에서 이런 방콕은 드문 경험이다. 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두고 오전은 새롭게 업데이트된 SNS를 살펴보고 과일 몇 조각을 챙겨 먹는다. 뒹굴뒹굴 소파에서 구르다가 점심을 챙겨 먹는다. 불 쓰는 일은 가급적 만들고 싶지 않지만 그게 뜻대로 안 된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 뭔가 선선해진 기분이 들어 루이스네 카게에 손님이 많이 오지 않을까 싶어 외출을 했다. 집에만 있으니 폐인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씻지 않아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빈둥거려도 제재할 사람이 없다. 해야 할 집안 정리는 많게만 느껴져서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제 글을 쓰는 일도 10주 과정의 긴장감이 끝이 나니 무슨 말을 어떻게 기록해야 좋을지 갈피를 못 잡겠다. 둘라에게 전화하는 일도, 산전 마사지를 예약하는 일도, 수유복을 구매하는 일도 자꾸 나에겐 공상과학처럼 다가온다.
미혼인 친구가 기혼 친구들과 함께 만난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수유 이야기가 나와서 서로 관심사가 확연히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출산 후 육아의 첫 시작은 모유수유와 함께 전혀 낯선 경험으로 초대가 시작되는 일이었다. 미혼인 친구가 당연히 이해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수유복을 사야 하나, 마치 우유만 짜내는 젖소가 되는 건 아닐까 벌써부터 그런 생각으로 질려서 막막한 느낌인데 말이다. 수유라는 카테고리로 발을 디디는 순간 유두보호기, 유두보호크림, 젖병소독기, 젖꼭지세척솔, 유축기, (종류도 여러가지인) 수유복, 모유저장팩, 수유패드 등 낯선 용어 투성이다.
난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젖소가 된 기분이 들었다. 모유수유와 분유수유의 장점과 단점이 적나라하게 비교되어 있다. 인터넷에는 육아라는 왕국과 관련해 정보가 넘쳐난다. 깔려 죽는 기분이 이런 걸까.
언제 출산하는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지낸다.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되도록이면 출산가방을 가지고 이동 가능한 거리에서 움직인다. 1시간 이상 되는 거리에 약속이 있으면 마냥 불안하다.
양수가 터지면 어떡하나, 이슬(생리 마지막 날처럼 보이는 혈이라는 사람도 있고, 맑은 이슬은 아니다)이 비치면 어떡하나 등 출산을 경험한 산모든 아니든 이렇게 인생에서 대기 타듯 기다렸던 때가 손에 꼽는다.
이런 불안감을 경험할 때는 빨리 낳고 싶다가도, 경험해보지 못한 진통이 주는 강도를 상상하면 아직 준비가 덜 된 기분이 든다.
답답해서 오래간만에 외출했던 나는 루이스 카게에 들어서자마자 폭풍 잔소리를 하는 내 모습에 놀랐다. 당사자에게 이루 말하기 어려울 만큼 미안했다. 타 죽어버린 에어플랜트는 분노와 짜증이 뒤섞인 잔소리와 함께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이래서 가족이 함께 장사를 하는 게 불화의 씨앗이 되는구나 싶다. 다음엔 걍 안 가는 게 서로 돕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폭풍잔소리하는 내 모습에 얼른 돌아간다고, 미안하다고 한 후에 손님이 와서 조금 도왔다.
장사는, 서비스직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매일이 아니라 잠깐 도와주는 건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여전히 콜드브루라떼 먹는 손님은 그 메뉴만 먹었고, 라지 사이즈 라떼를 먹는 종이접기 하는 사장님도 그 메뉴만 먹었다. 콜드브루 라지 사이즈만 먹는 손님도 만났다. 그들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 루이스 혼자 가게를 보는데 우루루 손님이 몰려오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말썽부렸던 제빙기 얼음도 실하고 투명하게 자기 역할을 감당했다(중고로 산 지 얼마 안 됐는데 한참 더울 때 얼음이 나오질 않아 며칠 애를 먹었다. 25만 원 주고 고쳤다).
복정동 아우네 뿅의 전설은 멀어서 가기 어렵고, 대안으로 짬뽕주의에 갔다. 특1급 호텔 출신 주방장이 하는 중국집이다. '특1급'이라는 문구가 자부심이면서 안타까움처럼 다가왔다. 호텔에서 만들면 더 비싼 돈을 주고 화려한 환경에서 일할텐데...라며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마음이 올라왔다. 탕수육은 미리 튀겨 놓았는지 딱딱했지만 맛있게 먹었다. 바쁜 점심에는 어쩔 수 없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려서 책을 볼까 하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져서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45-50분은 멀게 느껴졌다. 졸다가 내렸더니 소나기가 내렸다. 우산은 없고 점심때처럼 잠깐 기다리면 그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계속 내렸다. 팥빙수를 먹고 싶은 마음에 정류장에서 가까운 이디야로 들어가 오리진쉐이크(밀크쉐이크)를 마셨다. 쉐이크를 다 마실 때쯤 비가 조금 그쳤다.
나처럼 갑작스럽게 내린 비를 피해 이디야로 들어온 손님이 꽤 보였다. 친정할머니와 그 딸 그리고 아이까지 온 세 모녀가 옆 테이블에 앉았다. 어린 딸이 음료 먹는 모습을 엄마가 열심히 찍는데, 먼 훗날 내 모습일까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자기 새끼를 향한 넘치는 애정을 감당할 자신은 없다. 내가 보기엔 오징어말미잘똥꾸멍처럼 생긴 아이들도 있는데, 엄마 눈엔 자기 고슴도치가 가장 예쁜 법이라. 출산 고통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 그래도 예쁜 애는 진짜 예쁜 게 맞고, 못생긴 애는 걍 귀엽다. 요즘에는 먹는 즐거움도 전보다 줄었다. 이걸 못 먹으면 저걸 먹으면서 애꿎은 욕구를 달래고 있다.
며칠에 걸쳐 오프라인 매장에서 찾았던 베이비스타 도데카이를 드디어 대학로 세계과자점에서 영접했다. 베이비스타가 종류가 꽤 있는데 도데카이 이 녀석이 기가 막히게 내 입맛에 맛있다. 짠맛의 절정이라 맥주 안주의 탈을 썼다고 해야 할까. 베이비스타 라면땅처럼 생긴 과자는 잘 보이는데 도데카이 이 녀석 찾기가 정말 어려웠다.
인터넷이 더 싼 데 그 생각을 못했다. 하도 짜서 꼭 물을 많이 먹게 되는 과자다. 짜디짠 과자를 입안에 집어넣으며 행복감을 느꼈다.
별 일 아닌 하루였지만 지나치면 잊어버릴까 봐 기어코 몇 자 적고 잔다. 내일은 꼭 (맛있는) 팥빙수를 먹고 말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