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되는 줄도 모르고
출판사 취업을 포기하고 도서관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1년 남짓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의 1차 목표는 계약 종료와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좋았다. 몇 년을 벼러온 여행이었다. 대학 졸업 후 일과 취업 준비를 번갈아 하는 동안 여행 자금 명목으로 모아둔 돈은 고스란히 생활비로 쓰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좀 억울했다. 차라리 여행을 확 지를걸, 자꾸 후회가 됐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야 어떻게든 해결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누군가가 어린 나에게 해줬던 조언처럼, 더 나이 먹기 전에 무작정 떠나자고 마음 먹었다.
처음엔 책을 만지며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도서관은 내게 각별한 공간이었고, 도서관을 드나들며 이곳에서 일하는 기분은 어떨지 이미 몇 번이고 상상했었다. 대출대에 앉아 책장을 넘기다가 이용자를 친절히 응대하는 일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고, 고상해보이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순진한 이용자 1이었던 나는 도서관의 다이나믹에 온몸을 내맡기게 되는데...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것은 도서관이 육체적 노동과 감정 노동이 밀도 있게 결합된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주 효율성이 떨어지는 방식으로 책을 폐기하고 등록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는데, 예산 부족이든 능력 부족이든 상부에서 여러 핑계를 대며 저지르는 문제들을 일반 사서들이 몸을 갈아넣어 해결하는 게 이미 굳어진 행동 양식인 듯 했다. 소수의 이용자가 악성 민원인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고, 큰 민원 건이 터질 때마다 위에선 안절부절 못하며 사서들을 닦달했는데, 그렇게 결국 악성 민원인을 온몸으로 막아내거나 달래는 것도 일반 사서의 일이었다. 여러모로 스트레스 요소가 많은 직장이었고, 그 곳의 계약직이었던 나는 을 중의 을 노릇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 보니 이미 도서관에서 일하는 동안 번아웃이 세게 와있었다. 어디까지나 사서 '보조' 역할을 하던 내가, 복잡하거나 까다로운 업무를 맡은 것도 아니고, 출퇴근 시간 딱딱 지키는 와중에 웬 번아웃? 번아웃이 업무 강도보다도 업무 만족도와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모든 일에 전력을 다하는 나는 하다못해 서가를 정리하는 일에도 아주 진심이었어서 누가 굳이 나를 관리하지 않아도 알아서 모든 일을 해냈다.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 하고, 누가 짚어내기 전에 미리 해버리는 식이었는데 나의 성실함이 나의 '공'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나니 심한 권태감이 찾아왔다. 쇼맨십으로 일하는 사람, 그러니까 남이 볼 때에만 바짝 일을 하는 사람은 온갖 생색을 내고 그게 또 먹히고, 그가 퍼포먼스 하는 시간 외의 모든 시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발발거리는 내겐 돌아오는 게 없다고 생각하니 내내 억울하기만 했다. 그 억울함이 번아웃의 시작이었을 거라고 지금의 난 생각한다. 블로그에 지겹다, 지겹다는 말 취소, 지겹다는 말 취소한다는 말 취소 등의 말을 반복해 써내려가던 그때의 난 이미 아주 지쳐있었던 것 같다.
나를 소진하지 않는 방법, 아니, 조금 덜 소진하는 방법에 대해 자주 생각하지만 아직도 그걸 내가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다. 난 무엇에든 온 힘을 쏟는 사람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