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졌다, 그것도 아주 대차게

단단함을 자랑하던 나는

by 도브리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주기를 내심 바라며 떠난 3주간의 해외여행에서 되려 마음의 병이 더욱 깊어졌달까? 한겨울 북유럽을 여행한다는 건 오후 네 시쯤부터 해가 저물어 오갈 곳 없이 길을 헤매다 숙소에 쫓기듯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고, 서울보다 따뜻한 기온에 방심하다 예기치 못하게 소나기를 맞닥뜨리게 된다는 뜻이고, 운 좋게 우산을 챙겼어도 뺨을 후려치며 내리는 비에 우산이 아무 소용 없어진다는 뜻이라는 걸 떠나기 전엔 미처 몰랐지. 그러나 낯선 나라의 이른 일몰시간과 악천후에 ‘내 여행의 보잘 것 없음’의 모든 책임을 전가할 생각은 없고, 문제는 결국 나 자신에게 있었다는 걸 잘 안다. 여행으로 대단히 드라마틱한 변화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손에 쥐어지는 게 있었으면 했다. 도서관 계약직으로 꾸역꾸역 버티던 시간을 보상받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실업급여를 받으며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자고 마음먹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방향을 잡아나가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때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당시의 나는 이미 나의 많은 부분을 소진한 상태였다. 마음의 균형 따위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불안감은 먹잇감 없이도 몸을 불렸고, 내게 없는 것,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이 시야를 가득 메워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밤 산책을 하던 어느 날, 반환점을 찍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떠올린 이미지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오물신이 연상되는 거대한 진흙 덩어리가 이 길 위에 있고, 그게 한 발을 뗄 때마다 질퍽한 흙덩이가 속수무책으로 흘러내리고, 그렇게 몸체가 천천히 녹아 없어지듯 사라지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 진흙 덩어리가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도 나 자신이 낯설었다. 이전까지 나의 견고함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기 때문에. 단단한 나무줄기인 줄 알았던 내가 실은 슬쩍 부는 바람에도 맥없이 팔랑대는 나뭇잎인 모양이었다. 수개월 후 상담 선생님에게 여전히 아무 진전없는 하루하루를 고백하며 이런 내가 너무 답답하다 했더니 원래 넘어진 김에 쉬어가는 거라고 했다. 그래, 난 넘어졌지. 아주 대차게 넘어졌지. 무릎 살짝 긁히고 만 정도가 아니라 다리 한쪽을 못 쓸 만큼 보기 좋게 고꾸라졌지. 그런데 이제 와 궁금한 것은, 당장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뛰어가라는 무리한 요구를 어떻게 나 자신에게만은 일말의 미안함도 없이 할 수 있었냐는 것. 넘어진 달리기 주자에게 왜 넘어졌냐는 질문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정작 나는 넘어진 이유를 찾으려고 과거를 들쑤시고 다녔냐는 것. 물론 이미 답은 알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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