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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애희 Aug 11. 2024

펠릭스 발로통_ 오렌지와 보랏빛의 하늘, 그레이스에서의

시간 여행 _ 두 번째 퇴고

햇살을 품는 시간

집집마다 햇살을 품는 시간은 다르다. 우리 집은 남서향으로, 추운 겨울이면 ‘저녁 식사 준비를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5시 무렵이 되면 거실 창으로 석양이 한가득 들어온다. 이 시간만큼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하늘을 바라본다.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거친 파란 하늘에 기분이 좋았다. 홍시처럼 붉은 태양과 은은한 오렌지빛 햇살이 실내로 들어와 나를 따뜻하게 감싼다. 아이들 방, 거실을 넘어서 식탁이 있는 주방까지 길게 들어오는 햇살은 따뜻한 손이 되어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쓰다듬어 준다. 오래 머무를 것 같은 태양은 어느새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하늘은 은은한 오렌지빛에서 달콤한 솜사탕처럼 핑크빛, 보랏빛 다양한 색만 남겨놓는다. 펠릭스 발로통의 <오렌지와 보랏빛의 하늘, 그레이스에서의 노을 Sunset At Grace, Orange And Violet Sky, 1918> 작품 속 석양은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창밖의 석양만큼이나 빛깔이 정말 아름답고 따뜻하다. 이렇게 감탄하는 사이, 난 잠시 시공간을 넘나들며 추억 여행을 다녀왔다. 

펠릭스 발로통 <오렌지와 보랏빛의 하늘, 그레이스에서의 노을, 1918>

안녕, 악어 ‘빌’ 

보랏빛 노을과 노란 태양은 한 마리 ‘악어’로 변신해 나에게 인사했다. “악어 ‘빌’이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빌’을 보자 미소지어졌다. 순식간에 나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떠났다. 재잘거리며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내 옆에서 책을 보고 있다. 아이들이 책을 좋아해서였을까? 아니면 엄마인 내가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어서였을까? 잠들기 전 30분 ~ 1시간 정도는 다 같이 책을 보았다. 엄마 출퇴근 시간에 맞춰 하루 일과를 보낸 아이들은 무척 피곤했을 텐데 책 보는 시간만 되면 잠이 다 달아나 버린 듯했다. 칭얼거리던 둘째 아이도, 장난기 많은 첫째 아이도 집중모드가 됐다. ‘잠자리 동화시간인데, 우리 아이들은 언제 자려나?’ 걱정은 아주 잠깐! 책을 읽어주던 나도 어느새 동화 속 주인공과 동일시되어 함께 울고 웃었다. 때로는 걱정도 하고 놀라기도 하며 아이들과 함께 동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동화 속 그림을 쫓아가며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 듯했다. 


“머나먼 나일 강가에, '빌'이라는 악어와 '피트'라는 악어새가 살고 있었어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꼬마 제인이 없어졌어요.(토미 드 파올라)> 동화책은 사촌 동생 꼬마 제인이 없어진 걸 알게 된 악어 빌과 악어새 피트가 꼬마 제인을 찾아 떠나는 모험 이야기다. 아이들이 좋아했던 책 중 하나였다. “악당한테 잡혀가서 가방이 된 건 아니에요. 그 녀석은 아직 감옥에 있으니까요.”라는 문장을 읽던 중 내 머릿속에서 고가의 악어가죽 가방이 두둥실 떠다닐 때, 아이들은 악당에게 잡혀가면 가방이 될 수 있다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재미난 그림책이네!’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책은 ‘오! 이 책 뭐야! 대단한데!’ 놀라며 책장을 덮었다. 가족, 사랑, 우정, 믿음, 모험을 넘어서 밀렵, 환경까지 다양한 사회문제를 이렇게 따뜻한 이야기 속에 담을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안녕, 보라카이

그림을 바라보며 “정말 아름답다!” 외치는 목소리에는 떨림이, 눈가에는 촉촉한 눈물이 맺혔다. 나의 시간은 2005년 겨울로 떠났다. 하얀 눈이 내리던 추운 날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 날 저녁 신혼여행을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새벽에 도착한 필리핀 마닐라의 공기는 습하고 답답했다. 호텔에서 아침을 맞이한 우리는 조금 무서웠던 경비행기를 타고 또 하늘을 날았다. 그 이후 배를 타고 얼마쯤 지났을까? 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배가 정착했다. 드디어 ‘보라카이다!’ 외쳤을 때 무척 당황스러운 상황이 생겼다. ‘나 혼자 갈 수 있는데......’를 외치며 나는 현지인의 어깨 위에 올려져서 얕은 바다를 가로질러야 했다. 이런 마음은 우리의 최종 도착지인 보라카이의 은빛 모래 위에 발을 딛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햇살에 반짝이는 은빛 바다에 마음을 홀딱 뺏긴 나는 감상도 잠시, 패키지여행답게 바로 다음 일정을 진행했다. 신나는 해양스포츠를 즐긴 후 저녁 식사와 셀링 보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햇살을 담은 은빛 드레스는 옷장에 넣어두고 저녁노을을 담은 금빛 드레스로 갈아입고 저녁 무도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늦지 않게 저녁 바다 무도회에 도착했다. 탁 트인 바다, 금빛에서 붉은빛으로 변하는 하늘은 현실이 아닌 그림 같았다. 그동안의 긴장을 무장해제 시켰다. 몸의 긴장이 풀리니 마음 또한 편안해졌다. 결혼 준비부터 결혼식,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떠올랐다.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못하고 와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이제 나도 한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 부모님들도 잘 모시자.’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 하기로 한 그와 함께 가만히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그때 함께한 석양은 나에게 희망이었다.   

  

펠릭스 발로통의 ‘그림’ 한 장으로 오래전에 봤던 그림책을 떠올렸다. 내 안에 그림책의 주인공, 이야기, 색감들이 스며들어 있음을 느꼈다. 아이들 마음속에도 함께 책을 즐겼던 순간들이 내재되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펠릭스 발로통의 ‘노을’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신혼여행 때 느꼈던 감각들이 되살아났다. 너그러운 남편, 시시각각 바뀌는 사춘기 남매들과 함께하는 일상에서 나는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하고 싶은 일들, 할 수 있는 일들, 그동안 미루어뒀던 일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작은 날갯짓은 내가 모르는 그림자 속으로 안내할 것이다. 들어가 보자. 그럼 길이 보일 것이다. 세상의 금빛 햇살, 은빛 햇살이 기다릴 것이다.     


펠릭스 발로통의 <오렌지와 보랏빛의 하늘, 그레이스에서의 노을>

퇴고 2차 2024.08.10./1차 2024.07.13


숙현샘 합평

 

#펠릭스발로통  #그림으로글쓰기 #그림에세이 #살롱드까뮤 #공저모임 #퇴고 #노을 #그림책 #신혼여행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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