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줄 몰랐다. 남들은 드디어 봄이 왔다고, 겨우내 기다리던 봄이 온다고 좋아했다. 추위에 약한 나는 봄을 기대했지만, 겨울의 끝자락에선 봄이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봄은 새로운 시작이었고, 그것
은 나에게 늘 적응이라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3월 초 학창 시절에는 1년 내내 익숙했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새롭게 친구를 만난다. 낯선이들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누구와 친하게 지낼지 걱정이 앞섰다. 더욱이 나는 2년마다 새 학기에 맞춰 온 전학생이었다. 이사하고 적응하기 쉽도록 배려한 부모님 덕이었다. 모두가 새 학기라 처음이었겠지만, 그들은 모든 것이 낯선, 완벽하게 처음인 나보다는 유리한 위치였다. 긴장 가득한 교실을 향하는 길엔 봄바람조차 싸늘하게 다가왔다. 때때로 새 학기의 봄이 한겨울보다 더 춥다고 느껴졌다.한국의 새 학기는 왜 3월에 시작인 건지 속상
했다. 서방의 국가처럼 9월이 새 학기였다면, 봄기운을 완연히 즐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직업인이 된 후의 봄도 마찬가지였다. ‘3월에는 응급실에 가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3월의 병원은 갓 인턴이 된 의사와 농익지 못한 전문가가 긴장하고 있는 곳이다. 나와 나의 동료들은 3월이면 새봄에 쫓겨 인수인계를 받고 진료에 차질이 없도록 했다. 봄의 시작은 언제나 잘 모르
는 세계로의 첫발이었고, 두려움과 긴장감을 유발했다.
‘거봐, 봄에는 눈이 와.’
초봄에 보란 듯이 내리는 눈은 새봄에도 여전히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던 나에 대한 동의였다. 새로운 출발에 적응하느라 봄을 즐길 겨를이 없었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새봄이 오면 긴장부터 한다. 한참을 지내다 보면 어느덧 여름이 오고야 말았다.
올해에도 봄은 왔지만, 새봄을 즐기지 못할 것이 뻔했다. 이번 새봄에는 이사를 하고, 또다시 적응이라는 일거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6살이 된 아이가 새로운 곳에 적응을 잘 할 수 있을지 친구들은 어떻게 사귈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아이는 이런 내 우려와는 달리, 걱정이 없다. 매해 새봄마다 적응이라는 하기 싫은 숙제를 떠안고 있었던 나와는 사뭇 다르다.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집 앞에 놀이터 있지? 나는 그거만 있으면 돼.”
새로운 집과 낯선 곳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이곳에 몸을 맡긴다. 놀이터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놀고 있는 딸을 보니 내 근심도 사라진다. 녀석의 말처럼 놀다 보면,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적응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로 결국에는 적응하게 되어있었던 것을 그동안 나는 걱정하느라 새봄을 즐기지도 못한 채 흘려보냈다. 새봄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봄이 오고 가는 줄 몰랐다. 적응이란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유연함이 필요한 일인데, 나는 딱딱하게 굳은 채로 봄에 맞서고 있었다.
긴장감은 유연제 한 방울이면 설렘이 된다. 봄을 제대로 즐겨본 일이 없는 나는 이번 봄만큼은 제대로 즐겨보려 한다. 그저 이 봄을 즐기다 보면, 어느 순간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며 적응해 있을 것이다. 바람이 봄을 데려오고,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것처럼. 겨울바람보다 포근해진 봄바람에 나를 맡겨 본다.
겨우내 뭉쳐있던 어깨를 풀고 봄바람에 내 몸을 맡겨 유연함을 얻는다. 설렘 가득한 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