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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Dr MCT Jun 27. 2024

자존심도 주식처럼 익절해야 할 때가 있다

정신과 의사가 진료실에서 못한 말(33)

저는 친구와 같이 가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여행은 서로 몰랐던 모습을 알게 되고 가까워지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친구와의 여행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둘이서 가면 사소한 말다툼으로 오랜 시간 불편할 수 있습니다. 저도 여행을 여러 번 같이 간 친구가 있는데 어릴 때는 갈 때마다 그 친구와 말다툼을 꼭 한 번은 했습니다. 한 번은 서로 지도를 다르게 보고 이쪽 길이 맞는지 저쪽 길이 맞는지 싸우게 됐습니다(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없어서 지도에 의존했습니다). 저는 분명 지도를 맞게 봤다고 생각해 끈질기게 우긴 끝에 제가 가자는 길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우리가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긴 것이 창피하고 부끄러워 혹시 모른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가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가자고 한 길은 완전히 잘못된 길이었고 우리는 다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제 친구는 아직까지 그 사건을 말하며 저를 놀리고 저도 아직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럽고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을 어느 순간 더 이상 무를 수 없어 틀렸음을 인지해도 의견을 바꾸지 않는 것을 ‘매몰 비용의 오류’라고 합니다. ‘매몰 비용’이란 경제학 및 심리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이미 지출되었고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말합니다. 이 비용은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되지만, 사람들은 종종 매몰 비용을 고려하여 합리적이지 않은 결정을 내리곤 합니다. 경제에서는 자신이 투자한 돈이 ‘매몰 비용’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심리학에서는 자존심이 ‘매몰 비용’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이나 자존심이나 ‘매몰 비용의 오류’에서 빨리 빠져나오지 못하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투자한 돈을 손절하지 못하면 파산을 하게 되고 자존심을 손절하지 못하면 자존감까지 낮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너진 자존감은 쉽게 회복하기가 어렵고 회복하더라도 부끄러운 감정이 남을 수 있습니다. 마치 오래전에 고작 길 찾기로 자존심을 내세우다 아직도 이불킥을 하는 저처럼 말입니다.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는 법은 아주 다양합니다. 직장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도, 집안에서 좋은 가족원으로 인정받는 것도,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도, 집안일을 잘하는 것도 자존감을 유지하는 방법이 됩니다. 그중에서 자존심을 너무 세우지 않고 심리적 ‘매몰 비용’을 빨리 인정하고 처리하는 것도 자존감을 지키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틀렸음을 인식했다면 빨리 인정을 해야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환자분들에게 하면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을까요?’라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남이 실수하기만을 기다리다가 비난하는 아픈 사람들이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런 사람들은 소수라는 점과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멀리하면 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빨리 실수를 인정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과오를 반성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더 좋게 바라볼 것입니다.


심리적 ‘매몰 비용’을 빨리 손절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자신을 부정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이루는 수많은 결정 중 일부에 대한 의견을 바꾼다고 해서 자신이 아닌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또 주위에 스스로의 자존심에 묶여 끝까지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밉게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도 예전의 저처럼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가본 다음 자신의 실수를 알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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