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된다’는 사건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인생에서도 매우 전환적인 경험이다. 이제 한국에서는 결혼을 했는지의 여부 보다도 자녀가 있는지의 여부가 삶의 양식을 훨씬 더 크게 좌우하는 듯하다.
그런데 출산과 육아가 일하는 남녀의 삶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경력 상생의 첫걸음이다.
아내들의 경우 임신 기간부터 신체적 변화를 온몸으로 겪는다. 출산은 그 고통만큼이나 압도적인 감격을 준다. 하지만, 아기의 사랑스러움과 신체적 피로감 속에서 산후조리 기간을 정신없이 보내고 나서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예전의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아기를 돌보고 육아 정보를 수집하며 온갖 의사결정을 해나가는 낯설고도 거대한 프로젝트의 한 복판에 갑자기 던져진 채로 말이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의 PM은 아기를 직접 임신, 출산, 수유한 엄마들이 주로 담당하게 된다. (요즘 엄마들은 아이를 그냥 키우지 않는다. '잘' 키우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녀 양육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좋은 결과물을 추구하는 프로젝트가 된다. 이에 대한 내용은 따로 다룰 것이다.) 운이 좋게도(?) 함께 육아를 도와주는 조력자가 있다면 의견 충돌로 인한 스트레스는 덤이다. 한 동안은 삼시세끼 먹고, 자고, 싸는 가장 사적이고 기본적인 활동에 대한 자유를 박탈당한 채로, 차라리 출근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일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엔가 어딘가로 복직, 이직, 혹은 퇴직을 한다. 어떤 형태로든 일을 지속한다면 일과 육아의 병행 가능성이 관건이다. 근무시간의 유연성과 업무량 등을 최대한 조율하며 바쁘고 분주해진다. 아무리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얼마간의 기간 동안은 일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산과 육아가 아내의 경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앞서 구구절절 설명한 물리적인 여건도 작용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아무리 육아를 함께 하는 남편이나 부모님, 도우미, 기관이 있더라도 아기에게 '엄마'라는 존재의 의미는 대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엄마가 된다는 것이 일종의 권력이 되기도 하고, 한계가 되기도 하는 양면성을 갖는다. 어째튼 출산과 육아가 현실세계에서 여성의 경력을 바꾼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
자녀의 출산이 남편의 커리어에 당장, 직접적으로, 급격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아내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적다. 하지만 남편들도 아빠라는 이름을 얻게 되면서 심리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과거 1970, 80년대 산업화의 시기부터 1990년대 IMF까지 겪어온 우리 아버지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일 중심적으로 삶을 꾸려가는 경향이 높았다. 주 6일 근무는 물론이거니와 야근, 회식이 보편적이었고, 그렇게 물리적으로 직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만큼 가족 간의 관계에서는 소외되어 왔다. 안정적인 돈벌이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해왔다.
요즘 젊은 아빠들의 부성(fatherhood)은 조금 다르다. 양성평등의식이 높아진 만큼 육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breadwinner(생계부양자)'로서의 역할에만 머무는 것에 대한 반발감도 느끼는 듯하다. 경력 측면에서의 성취와 더불어 개인적인 취미와 여가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가족과의 유대관계도 더욱 중요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연구에서는 '남성들의 경우, 회사와 가족 중에서 가족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 생활은 일에 치중하는 경향이 높다'라고 보고한다(홍승아, 2014). 아버지로서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의식이 성숙해졌지만 아직까지 그에 따른 경력 지체를 용인해주지 않는 조직문화나 사회 인식이 반영된 듯하다. 그래서 남편에게 출산 경험이 경력에 끼치는 영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들에게 자녀의 출산은 실제로 돌봄이라는 부모역할을 수행하는 측면보다는 부모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데 더욱 영향을 준다. '아빠'라는 새로운 정체성에서 부여됨에 따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부끄럽지 않은 부모,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일에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준다.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육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육아와 교육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함께 참여하지만, 이것이 경력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한국사회에서 부부는 함께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지만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는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경력 상생을 위한 출발점이다. 아내에게는 육아가 경력의 지체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남편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는 남편들의 아빠 노릇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성과중심 업무 환경 속에서 아직까지 완전히 공평한 맞돌봄 체계가 안정화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울어져있는 토대를 이해하고, 이를 어떻게 전복시킬 것인지, 어떤 타협점과 자원이 필요할지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우선, 자녀 양육은 부모 양측이 함께 하는 공동의 프로젝트이며, 따라서 일과 육아의 병행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지속적으로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일가정 양립에서의 관건은 장기적 관점에서의 일의 '지속가능성'에 있다는 사실이다.
일과 육아의 조율을 당장의 역할분담 정도로 이해하기보다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서로의 장기적인 경력 유지와 개발을 위해 조력하는 과정으로서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