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여기 좀 봐주세요!! 정말 심하게 찢어졌어요!”
"헙! 일단 책상 위로 옮겨볼게요. 이거 정말 심각한데… 바로 수술 들어가야겠어요! 보호자님은 여기서 좀 기다려 주세요."
"네? 제가 보호자예요? 아… 선생님 여기는 완전히 떨어져 버렸는데 괜찮을까요~? 이거 진짜 제가 그런 건 아니에요…."
"걱정 말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인지, 일부러 찢은 것인지 진상을 밝히는 건 불가능하므로 따져 묻거나 조심 좀 하지… 식의 타박하는 잔소리는 할 필요가 없다.
"휴~ 수술 잘 마쳤습니다. 지금 회복실에서 대기할 시간은 없을 것 같고… 자. 보호자님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니까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점심시간 전까지는 절대! 절대! 펼치면 안돼요! 수술부위를 한 번씩 꾹꾹 눌러 주시고요. 이번 수술의 성패는 보호자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할 수 있죠?"
"아… 네. 네! 그럼요! 저 잘 할 수 있어요!"
긴급 책 보수 상황극이 마무리 되었다. 찢어진 책을 들고 울상이었던 소영이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수술을 마친 그림책은 본드가 채 마르기도 전에 대출되어 맡은 바 소임을 수행하러 떠났다. 하드커버와 책 알맹이가 완전히 분리된 부분은 제본용 본드를 바르고, 찢어진 책장은 보수전용 테이프로 모양을 잘 맞춰 붙였다. 인기가 많은 책들은 이렇게 회복실에 입원할 새도 없이 응급실을 스쳐 지나간다. 부디 소영이가 보호자 역할을 잘해주길 바랄 뿐.
제일 여닫기 편한 책상 오른쪽 수납장에는 틈틈이 사용하기 좋도록 다양한 보수장비들을 정리해 두었다. 대형 스템플러, 길이와 두께가 다양한 전용테이프, 제본용 본드, 북커버, 스퀴지, 칼, 가위, 프레스기 등. 장비들을 상황에 맞춰 적절히 활용하며 책을 고치다 보면 내 품을 떠났던 책이 다녀왔을 도서관 밖을 상상하게 된다. 무거워서 쿵 떨어트릴 때 모서리가 찌그러졌겠구나… 물에 젖었다가 마르면서 들러붙고 찢어졌구나… 책장을 급히 넘기다가 찢어졌구나… 처음부터 제본이 약하게 되어있던 책이구나… 이건 일부러 찢었구나… 상처를 안고 돌아온 책이 수술에 성공하면 훈장같은 흉터가 남고, 드물지만 수술에 실패하면 폐기가 된다.
쉬는 시간마다 패잔병 같은 책 앞에서 도서수리의 명의로 거듭나고 있는 나를 보던 도서부 반장이 볼멘소리를 한다.
"사서쌤 우리 도서관 책들은 불쌍해요. 새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이렇게 찢어지고 너덜거리는 책이 많잖아요. 이 '공룡 기네스북' 책은 정말 너무 많이 빌려가는 것 같아요! 서가도 맨날 어질러지고!"
"글쎄~ 불쌍해 보이지는 않는걸~? 어쩌면 영광의 상처가 아닐까? 책등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대출 돼 봤어? 10장 이상 찢어진 적이 없으면 말을 말어~ 이러면서 한 번도 대출되지 못한 책들에게 으스댈지도 몰라~ 먼지나 품고 있는 책들은 모서리가 너덜거리는 책들이 부러울걸?"
한번 정리해 두면 아무도 어지르지 않는 서가. 코로나가 한창일 때 그 끔찍한 고요함을 경험해 본 사서로서 장담컨대 몇 년째 책들이 꼼짝없이 가지런한 도서관은 망한 곳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어디에도 쓰임이 없다면 반짝반짝 낙서하나 없이 깔끔한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만약 아무도 펼쳐보지 않아서 쩍 소리가 나는 먼지 얹힌 책이라면 정말 '공룡 기네스북’ 이 부러울 것 같다. 진심이다. 살면서 그런 순간이 종종 있다.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마음, 자신이 품은 기량을 펼쳐볼 기회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품는 순간 말이다. 2018년 3월 어느 봄날. 지역 교육청 2층 사무실에서 사서면접을 보던 날이었다. 면접관들의 질문이 끝나고 면접실을 나서기 전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다음 면접관들을 둘러보며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도 될지 질문했다. 면접관들은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하는 나이 많은 지원자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마지못해 잠깐의 시간을 허락해주었다.
“저는 오랜시간 사서를 꿈꾸며 도서관 언저리를 맴돌았습니다. 사서가 된다면 도서관에서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업무가 정말 많습니다. 오늘 저 아닌 누구를 뽑으셔도 저만큼 도서관 업무에 애정을 가지고 임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으실겁니다. 제가 어떤 사서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뒤늦게 후회하지 마시고 저를 채용해서 꼭 확인 해 보십시요. 저는 이 일자리가 꼭 필요합니다!”
물론 이렇게 조리있게 말한건 아니지만 대충 이런 내용의 말을 낯뜨거운줄 모르고 간절히 늘어 놓았던것 같다. 창피함은 문제되지 않았다. 영원히 책꽃이에 가지런히 꽂혀있고 싶지 않다면 가끔은 망설임 없이 손을 번쩍 들어야 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당연히 그 오만방자한 멘트 덕분에 채용이 된 것은 아니겠지만 면접실을 나서는 당시의 내 마음은 결과와 상관없이 흡족했다. 마지막 멘트까지가 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나는 이렇게 도서수리의 명인으로, 사서로 쓰임을 다 하고 있다. 내가 공들여 사 모은 책들도 기꺼이 너덜너덜 해 지도록 우리 아이들과 서가 밖을 돌아다니면서 유용히 쓰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