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변화무쌍한 아지트의
파수꾼이다

by 느닷

방황하는 성장기 시절. 만화방은 권당 300원, 신간은 500원을 줘야 만화책 한권을 빌릴 수 있었다. 비디오방도 기본 2천원에 신작은 3천원을 내야 비디오테이프 대여가 가능했다. (기억속 금액이 맞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도서관은 공짜로 책을 빌려주었다! 당시 나에게 도서관이란 천국이었다. 한때 창원도서관 단골 고객이었던 나는 사서가 제일 부러웠다. 수많은 책을 마음대로 쥐락펴락 하는 능력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근무환경이 좋아 보였다. 더울때 시원하고 추울때 따뜻한 도서관은 잔소리 넘치는 우리집 거실보다 아늑했고, 신간도서가 항시 대기하고 있는 서가는 탐스러웠다.


문헌정보학과 4학년 재학시절. 동기들과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실습을 나갔었다. 나름 우리나라의 대표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자랑스러운 선배님들을 만날 생각에 밤잠을 설칠 정도로 들떴었다. 실습 첫날. 나는 도서관에 대한 환상을 품은 이래로 가장 충격적이고 은밀한 비밀 같은 조언을 선배님들에게 들었다.


절대 사서가 되지마라.

사서의 처우는 쥐꼬리만한 월급이 다 말해주고 있다.

전문성을 요하는 업무보다 단순노동에 가까운 일이 더 많다.

딱 10년만 버티면 관절이 다 나간다.

주말도 근무해야 하고, 야근이 일상이다.

결정적으로 정규직 채용을 거의 하지 않고 성장의 기회가 없다.

자원봉사자나 임시직으로 돌려막기만 한다.


근무 3년차 선배님의 진심어린 충고는 어린 나에게 충격 이상이었다. 참 무책임한 비판이었다 싶지만 사실 냉정히 돌아보면 그 조언에 거짓은 없었고 지금도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서는 국공립 도서관, 국회도서관, 기업체 도서관, 사립도서관, 학교도서관 등 다양한 기관에 취업을 한다. 그 중에서 학교도서관은 임용을 통한 사서교사와 지금의 나처럼 일반채용을 통한 공무직 전담사서가 존재한다. 아주 다양해 보이지만 채용 자체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취업의 기회도 별로 없고, 한시직이나 봉사직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아 처우도 열악하다. 대학교 졸업을 앞둔 나에게 도서관이란 순식간에 좌절의 아이콘이 되어 버렸다.


학교도서관에서 사서가 전문성을 인정 받은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보통 사서는 책을 대출/반납 해 주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책 대출/반납은 기계가 더 정확하게 잘 해주는 세상이다. 얼마 전 시내 지하상가에서 자동 대출반납기에 도서검색 기능과, 추천도서 목록까지 화면에 띄워주는 기능을 갖춘 멋진 자동화기기를 발견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이제 사서는 없어지는 직업일까? 과연 도서관의 역할은 이용자에게 책을 빌려주는것이 전부일까?

초등학교 도서관 이벤트 중 일부내용



얼마전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도서관에서 학생들에게 ‘나에게 도서관이란?’ 질문하는 행사를 한 적이 있다. 자신만의 정의를 포스트 잇에 적어서 게시판에 붙이면 간식선물을 주는 작은 이벤트였는데 아이들의 글을 읽고 생각을 곱씹은건 도서관을 드나드는 어른들이었다.

나에게 도서관이란
힐링하는곳이다.
비밀아지트 같은곳이다.
재미와 행복, 기쁨이다.
나눔도 가꾸는 공간.
희망이다.
신비한 나라이다.
도서관은 가족같다.
...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대출/반납하는 곳이라고 정의한 학생은 딱 두 명뿐이었다. 아이들이 말하고 있는 도서관의 정의에는 내가 이 공간에 담아내고자 애썼던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내 애씀이 아이들에게 잘 전해진 것 같아 몰래 울컥했다. 도서관에 오는 다른 선생님과 학부모님들은 학생들의 글을 읽으며 아이들에게 학교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를 새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이 알고있던 '도서관'의 정의가 바뀌었음을 내게 고백했다.


“도서관이란 책으로 옳은 길을 만들어 가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네요.”

“도서관은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는 아지트네요.”

“책은 그저 하나의 수단일 뿐, 책이 없어도 도서관은 도서관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내 인생의 힘든 시기마다 일보 후퇴의 안식처도 도서관이었다. 나에게 도서관은 인생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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