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대신 온돌마루

ㅣ음지의 변신

by 느닷

내가 아는 대부분 학교에서 교장실, 교무실, 행정실은 남향의 해가 잘 들고 접근성 좋은 교실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도서관은? 보통 북향 끄트머리 구석진 곳 어디쯤 있다. 꼭대기 층이나 별관 끄트머리에 뚝 떨어져 있는 경우도 다반사다. 덕분에 졸업하는 날까지 도서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학교를 떠나는 학생도 있다.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학교도서관이라는 것은 오다가다 무시로 들리고, 누구나 찾아오기 쉽도록 건물 1층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서 학교도서관이 학교 1층 중앙에 위치하는 행운을 차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내가 일하는 글빛누리도서관 역시 2층 북향의 끄트머리 공간에 있다. 매년 어느 교실보다 가장 먼저 겨울이 찾아오고 겨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에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온몸의 세포들이 비타민D 부족을 호소하는 게 느껴진다. 방과 후 도서관에 오래 머무는 꼬마 VIP들에게도 해 한 줌 없이 LED 등만 훤히 밝혀 놓은 서늘한 공간이 때론 미안했다.


볕이 가득한 날이면 나는 남쪽으로 창이 난 본관 2층 복도에 서서 운동장을 바라보며 잠깐씩 해바라기 한다. 가을바람에 운동장 바닥을 구르는 낙엽들이 점처럼 작게 알록달록한 아이들과 섞여 반짝이는 햇살에 버무려지면 불꽃놀이 못지않게 요란스레 눈부시다. 그렇게 잠시 광합성을 하고 나면 도서관의 냉기가 씻겨나가는 듯 슬리퍼 끝에서 얼어붙었던 발가락이 노곤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서관 문을 열면 지하 계단을 내려온 듯 삭막한 풍경이 펼쳐진다. 높다란 철제 5단서가와 기업체 대회의실에나 있을 법한 대형 책상이 엄숙한 모양새로 온기를 싹 걷어간다.


2021년 여름. 코로나로 학교가 조용할 때, 교장 선생님과 나는 도서관의 꼬락서니가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된다는 대화를 나누다가 급작스레 도서관 리모델링을 추진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오지 않는 지금이 최적기라는게 급발진의 이유였다. 다행히 필요한 예산은 교장 선생님이 어떻게든 마련해 오셨다. 나는 인테리어라고는 눈곱만큼도 몰랐지만 짬짬이 책과 인터넷을 뒤지고 다른 학교도서관을 견학하며 아이디어를 모았다.


도안을 완성하고 공사를 계획하는 데만 6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모던하게? 알록달록하게? 깔끔하게? 아기자기하게? 교장, 교감, 교무주임 선생님의 스타일이 다 달랐다. 최종 선택은 사서의 몫이라고 입을 모으셨지만, 진실이 아니었다. 차라리 학생들의 의견을 수집하면 좋았겠지만, 학생들이 학교에 오지 않을 때였다. 공사를 하는 중간 중간에도 관리자들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끝없이 들이닥쳤고 계획은 수시로 수정되었다. 완공 일자는 늘어난 미간의 주름과 함께 해를 넘겨 개학 이후로 미뤄졌다.


끝없는 도안수정에 따른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던 업체 디자이너는 병환을 이유로 사표를 썼다. 학교와 업체의 중간에서 나는 사서인가 박쥐인가 정체성이 혼란스러울 때쯤,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를 때쯤 공사는 끝이 났다. 심지어 도서관 리오픈을 코앞에 두고 나는 교통사고가 크게 나는 바람에 새 도서관의 시작은 구경도 못했다. 여하튼 생애 첫 도서관 리모델링 업무는 애증과 미숙함을 가득 담고 마무리되었다.


아쉽지만 공간상의 문제로 5단 철제 서가를 교체하지 못했다. 대신 학생 공모를 통해 철제 서가들에게 따뜻한 이름표를 붙여 주었다. 눈길, 꽃길, 새길, 별길, 달길, 물길, 온길, 해길.

“해리포터는 별길 세 번째 칸으로 가면 있어요~”

“옛이야기는 꽃길 제일 안쪽에 보세요~”

서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철제 서가가 사랑스러워졌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에 파스텔 톤의 새 서가를 들이고, 웜톤 곰돌이 페인팅으로 창가를 밝혔다. 화관과 인형으로 군데군데 재미를 끼워 넣었다. 복도에는 알록달록한 소파와 별, 달, 비행기 조명으로 호기심을 깔았다. 무엇보다 도서관의 긴긴 겨울을 위로하기 위한 야심작은 성능 좋은 온돌마루였다. 도서관이 너무 좁아서 온돌마루까지는 무리라는 수많은 의견을 물리치고 교장 선생님과 나는 창가 옆에 파스텔 색조의 계단식 그림책서가 아래 널찍한 온돌마루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불볕더위와 태풍이 창밖을 휩쓸고 간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도서관 문을 들어서는 아이들이 두 손으로 양팔을 문질러 대며 ‘춥다, 추워’를 연발한다. 새로 설치된 온돌마루를 켤 때가 된 것이다. 지난주에는 겨울 손님들을 불러 앉히기 위해 마루 위에 보들보들한 카펫도 깔았다. 이번 주부터 온돌마루의 전원을 켰는데 쉬는 시간에 바닥의 따스함을 발견한 아이들이 "어? 어! 와~!" 감탄사를 내뱉을 때마다 부족했던 햇살이 한 줌씩 채워지는 것 같았다. 카펫 아래로 발바닥을 쓱 밀어 넣으면 뜨끈뜨끈한 온기에 들썩이던 아이들의 엉덩이가 눌어붙었다.


방과 후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 구석에서 책을 읽다가 나와 함께 퇴근하는 아이들이 몇 명 있다. 나의 꼬마 퇴근 동료들은 요즘 서가위에 올려놓은 꽃 화관을 머리에 얹고 놀다가는, '해길 ' 서가로 가서 인기 도서를 골라 온다. 책 모양 쿠션을 베개 삼아 온돌마루 카펫 아래 다리를 밀어 넣고 줄줄이 드러누워 책을 들척인다. 그마저 시들해지면 머리맡 계단 서가에 꽂힌 그림책을 뽑아 슬슬 훑다가 자기들끼리 속살거린다.


"여기 정말 좋지? 책이랑 몸이 한 덩어리가 된 것 같아~"

"오늘은 진짜 여기서 못 벗어날 것 같다~"

"아까 정말 피곤했는데 이제 기분이 좋아 졌어."

"어? 이 책 엄청 재미있다! 너도 읽어봐~"


복도 창가에서 해바라기 할 때보다 더 따스한 군불이 가슴 가득 훈훈하다. 학교에 아이들이 맘 편히 발 뻗고 사색할 수 있는 아랫목이 생겨서 정말 다행이다. 아이들이 이 공간을 누릴 때마다 리모델링 기간 쌓였던 스트레스가 살살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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