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 꿈에 그린 미니멀 라이프
지난봄에 교통사고로 한동안 병원신세를 졌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였기에 다급히 입원하느라 뭘 꼼꼼히 챙길 겨를이 없었다. 내 침대 머리맡에 놓인 짐가방에는 물컵, 슬리퍼, 수저, 휴지, 칫솔, 수건, 로션, 충전기 정도가 하나씩 들어가 있었다. 이불도 한 장, 베개도 하나, 환자복도 하나. 하나가 아닌 것은 책 서너 권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경황없는 중에 책을 챙기다니... 덜 아팠거나,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둘 다인 상태였던 것 같다. 당연히 책은 한 장도 읽지 못하고 퇴원했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너무 아팠고, 치료받느라 힘들었고, 폐차된 차와 앞으로의 운전을 걱정하느라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물컵 하나로 양치도 하고, 물도 마시고, 커피도 마셨지만 물컵이 한 개라서 불편하다는 생각 따위는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퇴원하고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병원의 1인용 철제침대에 비해 내 잠자리가 대궐처럼 넓게 느껴졌다. 크고 작은 베개와 여러 겹으로 레이어드 된 화려한 이불이 나를 반겼다. 부엌에 갔더니 색깔별로, 크기별로 얼마나 다양한 그릇과 냄비와 컵들이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아이들은 물을 한번 마실 때마다 싱크대에 컵을 즐비하게 늘어놓았다. 딱 하루 설거지를 하지 않았는데 7개의 컵이 줄을 서 있었다! 이불과 베개는 내가 집을 비운 시간만큼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소파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은 소파의 본래 용도를 방해하고 있었다. 눈 질끈감고 모른척 하는것도 하루이틀이다. 오랜세월 가사노동에 세뇌된 주부세포는 악취풍기는 화장실 앞에서 나를 꼬집어댄다. 절대 허리를 쓰지 말라던 의사의 경고를 까맣게 잊고 결국 비실비실 설거지와 청소를 했다. 냉장고에 묵은 식재료를 내다 버리고, 세탁기와 스타일러를 돌리고, 청소기를 밀었다. 병원에서는 조금만 움직여도 틀어진 척추의 통증으로 고통스러웠는데 집에 오니 산더미 같은 집안일이 척추의 통증을 이겨먹었다!
내가 아프거나 말거나 그따위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내 손길과 에너지를 요구하며 존재감을 뽐냈다. 내가 부지런히 사다 쟁여놓은 살림살이들이 나 대신 이 비싼 집을 지키고 앉았다가 내게 사후관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방팔방 아무리 둘러봐도 나 말고는 아무도 관심없는 가사노동이 나를 다그쳤다.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집안일 앞에서 설움과 짜증이 허리의 통증과 함께 치솟았다. 그 뻔뻔한 물건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나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한다고~! 나는 베개 하나, 이불 한 장, 잠옷 한벌, 물컵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그때만큼 미니멀 라이프를 간절히 원했던 적이 없었다. 그 후로도 4달 동안 통원치료를 받으러 다니며 나는 집안에 존재하는 '과도하게 많은 것'들을 시원하게 정리했다. 버리거나 '당근 앱'으로 새 주인을 찾아 주었다. 넓어진 수납장과 거실을 바라볼 때마다 진심으로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가정을 일구고, 집을 장만하고, 가족들에게 필요한것들을 사다나르라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었다.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바쁘고 힘들어도 참고 버텼다. 그러나 집과 물건들의 관리에 애터지는건 나뿐인것을 보니 이 모든것은 오로지 내 만족을 위한 소비였음이 자명해졌다. 나는 이제 집안을 무엇인가로 채우는 일을 관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