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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 Nov 12. 2019

희비에 관계없이 모두 나의 선택이었다.

서른여섯 이방인 백수의 가을.

서른여섯 이방인 백수의 가을.


캐나다에서 5년. 녹록지 않은 일상에 파묻히다 보니 어느새 해가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무지막지하게 흘러가버린 시간은 어느 정도의 안정감과 평안함을 주었지만 비슷한 크기의 공허함과 황량함도 함께 주고 있다. 오롯이 우리끼리만 이겨내야만 했던 시간. 나누지 못했던 외로움,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공감들이 어쩌면 우리를 더 끈끈하게 만들어주기도, 또 어쩌면 타인에 대한 경계선을 선명하게 그어주기도 한다.


치솟는 우울감은 가을이기 때문일까. 백수가 되었기 때문일까. 원인을 갈구하는 것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난 뒤 몰려오는 허망함은 남편의 말처럼 생산적이지 못한 모습에 대한 강박일지도 모른다. 소속에서 벗어난 적나라한 '나'라는 존재를 어디로 내몰아야 할지 모르는 스스로가 우습기도 하다. 허전한 손과 마음, 머리를 어찌할 바를 몰라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긍정을 억지로 끌어내어 보지만 그 마저도 비루해 보여 포기하고 만다. 여유를 즐기지 못하는 서른여섯 백수 이방인의 꼴사나운 가을이구나.


오너의 불쾌한 방귀소리도 참아가며 일 년을 버티어 온 회사를 박차고 나온 후, 후회감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당장에 이어질 무직의 시간과 넉넉지 못한 곳간에서 꺼내야 할 소박한 통장 잔고 생각에 적어도 이틀은 상당히 힘들었으니.


하지만 그것도 나의 선택. 


어느 것 하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들이 없어 굳이 원망할 대상을 찾을 일도 아니다. 통밥 빠삭한 직장생활 12년 차에 씁쓸한 마음으로 자진퇴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속 시원하게 잘 그만두었다고 말하는 남편의 다독임과는 상반되게 당장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월세, 자동차 할부금, 공과금 출금 날짜들이 달력 속에서 도드라져 보인다. 마치 키득키득 웃으며 꼴좋다는 표정으로.


백수를 즐길 수 없는 무늬만 청춘인 날들이다.


나이아가라 폴 보트 위에서



독립영화의 한 장면처럼.


회사를 쿨하게 때려치우고 이 주 만인가 아주 운이 좋게도 비한인 회사이면서 전혀 다른 직종으로 취업이 쉽게 되었다. 귓속을 쨍쨍하게 울리는 기계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가 서 있는 이곳, 그 한 장면이 꼭 독립영화 속인 것 같다. 빠르게 회전하는 기계 소리와 어두울 틈 하나 없이 빽빽하게 켜져 있는 백열등 아래에, 어색하게 끼워진 장갑과 잠깐이라도 목을 축일 수 있는 은색 텀블러, 모조리 익숙한 것이 없다.


문득 십 년 전 오늘의 나는, 십 년 후 오늘의 내가 먼 땅, 남의 나라에서 해보지도 않은 기계음에 섞여 일을 하게 될 것이라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과 직장 동료라는 호칭으로 전광판에 걸린 시간에 의지하며 브레이크 타임을 기다리는 순간을 떠올려본 적은 분명히 없었다. 막연하게 그려보기만 했던 미래의 나의 모습에도 조합되지 않았던 신기한 모습을.


몇 년의 타국 생활로 얻은 장점 중 하나는 경험이 없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인데,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먹고살 돈이 필요하기에 가릴 수 없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물론 타인의 삶과 시선에 우리의 기준을 애써 맞출 필요가 없기에 궂은일이라도 가리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직업의 귀천은 글세, 세련되지 못한 한국식 마인드를 못 버린 사람들이 아닌 이상 굳이 따지지도 않는 나라이기 때문.


캐나다에 살면서 무릎을 탁 치도록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더 열심히 살 수 있었구나'라는 것이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꾀부리며 살아본 적도 없지만 지금을 보면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열심히 살고 있다. 후회할 일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라도 나의 최선이 역량을 충분히 다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할 뿐이다.


짧지 않은 이민생활의 내공으로 나름 무장을 하며 하루씩 나아가고 있다. 더욱 치열해질 시간과 간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외로움과 향수가 얼마나 발목을 잡을는지는 알 수 없다. 상상해 본 적 없는 삶 속에 있지만 그것은 희비에 관계없이 모두 나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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