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한국말의 아쉬움
"밖에 눈이 쌓였네."
남편이 아침을 알린다.
새벽 운동을 다녀온 남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샤워를 하러 들어간 남편을 뒤로하고 어둡게 닫힌 블라인드를 걷고 본 바깥 풍경은 역시나 캐나다스럽다. 이 정도 눈발은 이제 이쁘지도 설레지도 않는데. 무거운 스노우 부츠에 두터운 방수용 재킷을 입어야 함이 귀찮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이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눈 놀이에 쓸 장갑을 꼭 챙겨달라고 부탁한다. 함께 방한용 모자를 찾아보지만 갑자기 찾아 꺼내기엔 분주한 아침이라 재킷에 부착되어 있는 모자를 이용하라고 회유를 한다. 예년보다 빨리 시작된 겨울이 성가신 기분마저 들었다.
아침 등교 길. 얼마 전부터 한글 공부를 시작한 아이에게 winter가 한국말로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겨울이라는 발음을 어려워하지만 열심히 따라 하려는 모습이 이쁘다. 한글의 감성을 잘 느끼지 못하는 아이에게 겨울이라는 말은 하나의 랭귀지에 지나지 않음이 아쉽다. 외국어를 써야 하는 나라에 살다 보면 한글이 주는 말의 운치가 새삼스럽게 느껴지곤 한다.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아이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이름을 반복해서 알려주었다. '겨울이 시작되었다.'라는 말을 시켜보니 영락없는 교포 발음으로 띄엄띄엄하게 말한다. 아이와 우리 사이의 언어라는 벽이 낮게 쌓이고 있음이 느껴진다.
한글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엄마! 김치 먹어봤어?"
라며 투명한 위생봉투 속에 담긴 김치 한 움큼을 건네준다. 한글 교실에서 김치를 만들었다고 자신 있게 보여주는 아이의 얼굴에 왠지 모를 상기됨이 엿보인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아이가 가져온 김치보다 온전한 한국말로 완성시킨 한 문장에 더 감동을 받았다. 또래 아이들보다 늦게 시작한 한글 공부라 그런지 덩치가 산만한 아이가 어렵게 내뱉는 한국말들이 꼭 첫 말문이 틔이는 아기를 보는 것처럼 신기하고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잘 구사되지 않는 발음의 난관에 봉착된 아이의 얼굴 표정은 특히나.
커가는 아이와 정서적 유대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은 이민 가정에서 흔히들 할 수밖에 없는 문제 중 하나이다. 부모와 자식이 하나의 언어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보통 문제는 시작되는 것 같다. 제대로 전달될 수 없는 의사 표현들이 쌓이다 보면 결국엔 각자의 마음속에 표현되기 힘든 진심들은 쌓아둔 채로 거리를 생기게 만드는 게 아닐까. 적잖이 들리는 선배 이민가정들의 부족한 대화로 인한 불화 소식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언젠가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우리에게도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서 자는 아이에게 섬집 아기를 불러주기도 하고 아빠와 엄마가 어릴 적 한국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재밌게 들려주려 노력하고 있다.
이민 생활이 길어질수록 아이와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언어뿐만이 아니라 한국과 캐나다 간의 정서와 문화의 이질감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이지만 어른인 우리에게 'you'라는 표현을 쓰고, 식탁에서 쉐어링(sharing) 하지 않는 문화는 아직도 어색하기만 하다. 학교에서는 절대 각자가 가지고 온 스낵을 공유할 수 없게 되어있기에 네 것, 내 것의 구분은 확실하게 짓는 편이라 아빠 엄마와의 밥상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 반찬은 앞접시에 꼭 덜어서 줘야 하고 여러 개의 컵이 뒤섞여 있을 때엔 어떤 것이 자기 컵인지 반드시 확인 후 물을 마시는 모습이 낯설긴 하지만 아이에게 그것이 맞고 틀리다고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한국인 가정에서 부모는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아이는 캐나다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라를 바꿔 살면서 한국스러움을 고집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하지만 아이에게 이 것 하나는 강요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말을 하는 것. 우리가 통하지 않는 문화와 정서 속에서도 꼭 통해야 할 가족의 사랑과 정은 분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