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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 Nov 29. 2019

캐나다 생활 가계부

잔고는 가볍고 마음은 무겁지만. 


가계에 비상등이 켜지다.
 

직장을 옮기고 고정 수입에 변동이 생기면서 부득이하게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새 직장에서는 아직까지 온콜 포지션(on-call: 전화로 일을 배당받아야 근무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 들쭉날쭉해진 인컴으로 가계에 비상등이 켜졌기 때문이다. 사이드 잡을 뛰고 있지만 따박따박 계좌에 꽂히던 고정 수입에 비하면 불안한 금액이라 두리뭉실하게만 파악했던 예전과는 달리 제대로 상황을 마주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거기에 렌트비 상승(집주인이 집을 내놓은 관계로)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상황. 시세로 따지자면 한 달에 5-60 만원이나 지출 금액에서 추가되어야 한다. 일정치 않은 소득에 고정 지출금액 상승까지 첩첩산중을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일까.


투잡을 하고 있는 남편과 나의 인컴은 숫자로만 본다면 나쁘지 않게 번다는 것뿐 정확하게 얼마가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알지 못했다. 계좌에 찍히는 월급과 카드 명세서에 나오는 합계 금액으로 소득과 지출을 대충 파악하며 살아왔었으니. 그저 적게 벌지는 않는다는 오만함과 사치스러움은 없다는 자만함에 가계부 따위는 없어도 세이빙 계좌에 차곡차곡 돈이 쌓여가는 줄만 알고 살아왔다. 그런 믿음에 반해 버는 것 대비 모이는 돈이 적은 기분이 따라다니던 것이 전혀 생뚱맞은 일은 아닐 것이다. 




정확한 데이터가 시급했다. 대충이 아닌 정확한 자료를 기반으로 한, 실 출입 내역이. 먼저 지출을 크게 두 가지로 일명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과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늘고 줄어들 수 있는 돈으로 나누었다. 


고정비(숨만 쉬어도 나갈 돈)는 렌트비, 차량 할부금, 차량 보험금, 집 보험금, 인터넷 비, 휴대폰 비, 아이의 방과 후 교실 비 등으로 생각보다 큰 금액이 지출되고 있었다. 한 번도 제대로 합계를 내어보지 않고 추산 금액으로만 생각해오다 막상 월 3천 불이 넘는 금액이 고정 지출비로 나가고 있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먹고, 쓰고 하는 돈은 일체 포함이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거기다 앞으로 올라갈 월 렌트비까지 포함하면 한 달에 거의 4천 불이 고정적으로 지출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많이 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손댈 수 없는 고정비를 제외하고 지킬 수 있을 법한 최소한의 세이빙 금액을 정했다. 총소득금액에서 고정비와 최저 세이빙 금액을 차감한 후 남은 숫자를 우리의 실제 한 달 생활비로 정하고 그 금액을 목표로 살아보기로 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숫자였다. 그 돈으로 2주만 버텨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금액으로 한 달을 버티어 보기 목표를 세우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내가 좋아하는 엑셀 프로그램으로 나만의 가계부를 만드는 일이었다. 우리의 정확한 소비 행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이 부분 역시 꼭 지출되어야 할 식비와 외식비 그리고 불필요했던 지출 금액으로 항목을 세분화하여 정리하기 시작했다. 진짜 진짜 써야 하는 돈한 번 더 생각해보면 쓰지 않았어도 되는 돈으로 정리해보고 싶었다. 




독한 마음을 먹고 쓰기 시작한 한 달 가계부의 결과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목표로 했던 지출금액을 뛰어넘은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고 한 달 내내 아껴야 된다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과는 상반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최소만을 생각하며 썼던 주유비, 식비 등은 생각보다 큰 금액으로 지출되고 있었다. 물론 불필요하게 사용했던 금액 역시 다짐과는 별개인 것처럼 지출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 불 필요했던 지출 목록들을 보면 절약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것 하나쯤이야'라는 마음으로 계산대에 올려두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끼고, 아끼고, 아끼고.....,
잔고는 가벼운데 마음은 너무나도 무겁다.



최소 500불은 더 아낄 수 있었다는 후회감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보니 문득 억울한 감정이 가슴을 뚫고 나왔다. 남편은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서도 주말 사이드잡을 뛰고 있고, 나도 비록 사이드 잡이지만 풀타임에 가까운 시간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정도의 기초생활 만족도 못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것인가 의구심이 마구 솟구치기까지 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쓴 가계부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한 끼에 5만 원이 넘는 외식이 없고, 한 벌에 3만 원이 넘는 티셔츠 한 장이 없으니 말이다.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단벌의 카키색 겨울 점퍼와 발목을 다 덮지도 못하는 낡은 구두까지, 우리의 이민 생활을 대변하여주는 것 같아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생각해보니 남편도 세일의 세일을 거듭하여 마지막 떨이로 파는 만원 남짓한 티셔츠 한 장을 살 때에도 몇 번을 손에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면서 결국엔 사지 못하고 놓아버리기 일쑤이고, 그 좋아하던 소주(캐나다는 한 병에 만원 정도)도 한 달에 두어 번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마음이 궁핍해진 것 일까. 이유를 굳이 먼 데서 찾을 필요는 없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실로 우러나오는 이민자라는 불안감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은 뻔하니까. 또 한국과 비교를 해보면 어쨌든 자가(비켜줄 필요가 없는) 생활로 인한 고정비용에서 큰 차이가 나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옵션이 캐나다보다는 더 많기에 불안정한 마음으로 살지는 않았었다. 내 나라 내 가족이 있는 터전이 주는 안정감은 비교대상이 될 수가 없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생활비 파악을 목적으로 파이팅 넘치게 시작된 가계부 쓰기는 통한의 감정으로 끝이 났다. 반성은 조금 더 아끼자는 것보다 팍팍한 삶 속에서 여유를 조금씩 넓히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안 써도 되었을 500불에 후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500불어치의 마음의 여유도 없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서글픈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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