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싶었으나 눈이 저절로 떠졌다. 밤새 내린 봄비가 잦아드는 중인 듯 토독토독- 빗소리가 들렸다. 거실로 나와 토독토독- 소리가 잘 들리도록 창문을 열고, 베개 하나를 품에 앉고 TV를 틀었다. 좋아하는 드라마들을 보고, 냉장고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오래전에 사놓은 골뱅이와 비빔면을 꺼내 휘리릭~ 비벼 다시 TV 앞에 앉아 <나 혼자 산다>를 틀었다. 그렇게 TV 속에 손담비엄마의 '스타' 딸과 함께하는 시장 행진과 기-승-전-시집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니 한참 전에 써 놓은 이 글이 다시 꺼내보고 싶어 졌다.
아빠는 왜 그럴까?
내가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아빠는 "그거 몇 푼이나 번다고, 그 고생을 하고 있냐?"라며 못마땅한 듯 퉁퉁-거리셨다. 말을 예쁘게 하지 못하는 아빠가 오랜만에 만난 딸이 다크 라인이 턱밑까지 내려온 걸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고 처음엔 애써 웃어넘겼다. 하지만 3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났는데도 아빠가 같은 말만 반복하자 아빠만큼 말을 예쁘게 하지 못하는 나도 '그거-' 하고 말을 꺼내려고 하면, "쓸데없는 말 할 거면, 여기 다신 안 와!"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계속 돈을 못 벌었고, 고생은 점점 더 심해졌지만 영화일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럴수록 아빠의 못마땅한 잔소리도 계속됐다. 둘 중 하나가 포기하면 될 텐데... 둘 다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고, 1년 겨우 두 번 만나기도 힘든 부녀의 끝은 늘 아름답지 못했다.
그러다 내가 제작실장이 되면서부터 참여했던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시장에서 일하는 아빠가 주변 상인분들과 함께 보시도록 시사회 초대권을 넉넉하게 사서 아빠한테 보내드렸다. 그리고 시사회 초대권을 받은 아빠는 "이런 걸 뭐한다고-"라는 생뚱한 반응이었다. "그럼 버리던지-" 나 역시 늘 생뚱하게 말하면서도 1년에 한 작품씩, 그러니까 1년에 한 번씩은 시사회 초대권을 아빠한테 보내드렸다.
그리고 내가 제목만 말하면 나름 알법한, 그러니까 꽤 흥행한 작품을 한 뒤였던 거 같다. 아빠의 생일날, 오랜만에 아빠를 만났다. 아빠는 생일이어서 그런지, 그냥 기분이 좋은 건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너 지금 한다는 그거 제목이 뭐라고? 그거 언제 개봉하는데? 그거 유명한 사람은 나오냐?"
'그거-'에 대한 아빠의 고정 멘트가 바뀌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딸의 안부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이 뭔지를 더 궁금해했다. 나는 외우기라도 하듯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아빠가 살짝 귀찮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잔소리보다는 관심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밥을 먹으러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는데 아빠가 갑자기 시장 쪽으로 걸어가는 거다. 식당으로 가는 지름길인가? 싶어 아빠 뒤를 따라 걷고 있는데 아빠가 갑자기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얘가 영화한다는 내 딸~ 네가 지금 하는 게 뭐라고? 그거 보고 싶으면 나한테 말만 해. 거기 주인공이 OO인데 얘가 그 사람이랑 친해"
"아빠, 나 그 사람이랑 안 친해.. 그 사람은 내 이름도 몰라... 아빠 지금 목소리 너무 커. 이러지 마. 제발..."
나는 너무 창피해서 '그만하라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애써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아빠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시장 입구 국화빵 아주머니부터 꽃게 파는 아저씨를 거쳐 시장 골목 사이사이를 다 돌며 나를 소개했고, 나는 상인분들과 악수까지 하며 시장을 횡단해야 했다.
아마 그날 다른 사람들은 연예인이라도 온 줄 알았을 거다. 아빠가 더 이상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잔소리하지 않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그날의 창피함은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요즘 아빠의 고정 멘트는 단연코 '시집'이다. 아빠는 장사 때문에, 나는 일 때문에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많이 하지 않는데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아빠가 몇 달째 예정에 없던 긴 휴가를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포기한 줄로만 알았던 나의 '시집'이 다시 아빠의 큰 관심사가 되었다. 아빠는 매번 걱정스러운 안부를 물으며 전화를 걸어서는 결국 '시집'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내 몸 하나 감당하기도 벅차고, 그렇다고 내 몸 하나까지 감당해줄 사람도 없다고. 그런데 무턱대고 '시집'을 갈 수는 없지 않냐고! 말한다. 물론 이런 말들이 아빠를 납득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안다.
둘 중 하나가 포기하면 될 텐데... 둘 다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다시 시작되고, 결국 우리 두 부녀의 통화는 다시 아름답지 못하게 마무리되곤 한다.
아빠가 하는 모든 잔소리가 나를 향한 걱정의 서툰 표현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걱정을 웃으며 포용하는 일은 내겐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아빠에게도 나의 시집은 내 일을 받아들이시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랑스러운 딸은 못되지만, 혼자서도 잘 살 테니 지켜봐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