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눈꺼풀이 무거우 날, 그래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날이다. 이런 날은 집에만 있고 싶지만 맛있는 커피는 먹고 싶어서 집 근처 북카페로 엉금엉금 걸어갔다. 며칠 전 발견한 이 북카페는 집에서 7분이면 갈 수 있는 곳으로, 책이 많지는 않지만 북적거리지 않아 나만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어 아지트로는 딱이다.
간판을 보자 오늘이 그냥 흘러가지 않을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던 것도 잠시 <대관으로 오늘은 쉽니다.>
헉.. 왜.. 하필 오늘이야ㅜㅜ 인상 좋은 사장님의 미안함 가득 담은 얼굴을 뒤로하고,‘집으로 다시 가야 하나?’ 고민하며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어?’ 하는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간단한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고, 그와 나는 각자의 길로걸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첫 제작부장을 하게 됐을 때였다. 친한 오빠에게 함께 일하게 된 직원으로 그를 소개받았다. 겨울이었고, 추웠다.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그의 마른 몸 때문인지, 그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기 때문인지 찡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그의 첫인상이었다. 그리고 내가 첫 제작실장이 되었을 때 그를 다시 만났다. 하지만 눈인사 외에 그와 내가 부딪힐만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가 나와 같은 제작파트 일을 시작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는 일을 잘하는 것 같았다. 그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그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를 응원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고, 오랜만엔 모인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그가 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네가 독한 년이라 너랑 같이 일하면 힘들 거라고”
“그래서 걔랑 같이 일했던 애들은 너랑 일 안 한대”
“응? 난 그 사람하고 같이 일해 본 적도 없는데?”
다른 파트일 때는 같은 프로젝트를 했지만 부딪힐 일이 없었고, 같은 파트일 때는 함께한 작품이 없었다. 그런 그가 왜?!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한 가지 추측이 가능했다. 그를 소개했던 오빠, 오빠는 10년 넘게 내가 믿고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사람인데.. 오빠가 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건가? 오빠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한테 섭섭한 거 있어?”
“됐고, 무슨 일인데?”
“혹시 내 욕하고 다녀?”
“뭔 소리야?”
“아니, xx 씨가 내 욕을 하고 다닌다는데.. 그 사람은 나를 잘 모르잖아!”
“야, 너 나 의심하냐?”
“어”
“네가좀 또라이긴 한데... 그래도 나쁜 년은 아니지!”
“욕하고 다녔네”
“내가 널 왜 뒤에서 까? 난 까도 앞에서 까”
“.....(흐음)”
“내가 욕하고다닐거면 너를 왜 만나냐? 그리고 네가 그 정도 위치야?”
“아니지, 미안. 근데 그럼! 그 사람은 왜 내 욕을 하고 다니지?”
처음엔 전화라도 해서 묻고 따지고 싶었다. ‘저에 대해서 잘 아세요?’그리고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하고 싶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그는 경솔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니 함께 일하지 말라고’ 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마구 마구 퍼뜨리고 싶었다. 매일매일 그와의 일들을 생각했다. 혹시 ‘내가 나도 모르게 그에게 실수한 게 있었던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나에게 이러는 이유는 찾을 수가 없었다.
계속 불편해하는 나를 보고 그를 소개했던 오빠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한 가지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내가 그의 과거를 알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그에겐 그 시절이 알리고 싶지 않은 과거인데 내가 그때의 그를 알고 있기 때문인듯하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응”
“그게 나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고 다니는 이유가 된다고?”
“응. 그 녀석한테는 그게 중요해”
물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별일 아닌 일이 되기도 하고, 나에겐 아무 일도 아닌 일이 다른 사람에겐 큰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단지 그를 알 뿐이지 그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한 적이 없다. 오빠는 함께 일했던 그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나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것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나는 오빠의 사과를 받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 제작파트의 주요한 일 중에 하나는 '라인업'이다. 영화가 투자와 캐스팅이 확정되면 촬영, 조명, 미술 등 여러 파트에서 함께 일할 스태프들을 결정한다. 먼저 최근 영화들을 기준으로 각 파트의 스태프 리스트를 만들고, 리스트 중에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들의 스케줄 및 '소문을 수집'한다.
'A는 일은 잘하는데 성격이 더러워'
'A는 고집이 세서 성격이 나쁘다고들 하지만 틀린 말을 하진 않아'
같은 A를 두고도, 각자의 입장에서 A에 대한 평판은 각기 다르다. (물론 정말 이상한 사람은 한결같지만)
그래서 주로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의 의견을 듣고 참고한다.
그리고 때로는 선입견이 생길까 두려워 만나 본 후,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본다.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다시 주변에 물어보기도 하고, 주변의 이야기가 내가 만났을 때의 느낌과 너무 다를 때는 상황을 의심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서 사람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듣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에 대해 알 수없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직책이 올라갈수록 '이 사람 어때?'라는 물음을 많이 받게 된다. 그러면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 사람을 생각한 뒤 내가 겪어본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와 잘 맞지 않았던 사람일수록 만나보고 판단하길 권유한다. 내가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라고 할지언정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든 직접 겪어봐야 한다. 직접 겪어 본 후에야 그 사람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나를 겪어본 사람이 나에 대해서 하는 평가는 쓰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하는 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무심코 던진 작은 돌에도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우연한 만남에 숨겨두었던 상처에서 다시 피가 났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표정이나 감정관리 기술이 늘었다지만 여전히 상처는 아프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내가 생각했던 말과 행동들이 내 의도와는 다르게 전달될 수도 있다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쩌면 그도 그럴 의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